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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강공 이상급 신도비( 忠剛公 李尙伋 神道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충강공 이상급 신도비( 忠剛公 李尙伋 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4. 6. 20:47

 

 

충강공 이상급 신도비는 주덕읍 사락리 504번지 음동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비석으로써 충강공 이상급은 조선 선조5년(1572년)에 태어나 인조15년(1637년)에 사망하신분으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603년에 진사가 되고 1606년 증광문과에급제하였다.
그는 승문원(承文院)의 저작(著作), 박사(博士)를 거쳐 형조좌랑(刑曹佐郞)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평안도사가 되었으며, 이후 형조정랑, 풍기군수,장령, 집의, 등대간, 단천부사, 연안부사, 제자시강원의 보덕, 병조참지의 벼슬을 거쳤는데 한때는 벼슬에 뜻이 없어 충주고을로 돌아와 후진을 가르치며 농사와 낚시로 소일한 적도 있었다.
그는 19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宣祖)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40여일동안 대결하였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묘사(廟社)를 받들고 강화도로 들어간 충숙공(忠肅公)(仲尙吉)을 찾아가다가 도중에서 적병을 만나 대결하다가 순절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는데 시호(諡號)는 충강(忠剛)이다.
충강공의 신도비는 1616년(숙종42년 병신)10월에 세워졌다. 이 비는 대석을 8면으로 만들었고 8면에 조각을 하였으며 6개면은 연꽃을 대칭되는 2면에는 동물상을 조각하였다. 대석의 윗면은 큼직큼직한 연꽃잎 8개를 조각하고 8각 기둥형의 비를 세웠다. 한면의 길이는 26cm로 8면에 동일한 글자를 새겼다. 비에 사용된 석재는 흰색의 대리석이며 이수는 4각으로 만들어 지고 비와 이수가 같은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다. 전후면에 각각 두 마리의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여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 비는 형태가 특이하고 그 조각이 뛰어나며 비문은 예서체로 새겨졌다.
두잠(豆簪)은 현손(휘 정상, 도사), 비문은 현손(휘 정박, 문학)이 글씨를 썼다. 1714년(肅宗40년 甲午)에 신도명(神道銘)을 새겨 1716년(肅宗42년 丙申) 10월에 세웠다.1930년에 신도비의 풍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비각을 건립하였는데 1980년 충청북도 지방문화재 제 63호로 지정된 이후 1981년에 중수(重修)한바 있다. 1983년에 6문의 한식건물을 건립하였고 1989년 재실은 완전 개축하고 3간의 삼문과 일각문을 신축하고 담장을 새로 하여 면모를 일신케 하고 묘원 앞 연못을 복원하고 참의공 묘비주변을 정화하고 진입로를 신설하여 1999년 10월28일 준공되었다.[주닥읍지]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이상급의 신도비.

충북 유형문화재 제 63호로 지정되여 관리되고 있다.

[개설]
이상급(李尙伋)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자는 사언(思彦), 호는 습재(習齋)· 당부(戇夫)이며,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정조 때 안찰사가 부임하자 풍기군수였던 이상급은 속관(屬官)이 되기를 거부하고 사임하기도 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재등용되었으나 직신(直臣)의 기품이 있어 싫어하는 자가 많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올라가 인조를 호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묘사(廟社)를 모시고 강화도에 들어간 형 이상길(李尙吉)을 찾아가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 후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건립경위]
1714년(숙종 40)에 신도비명을 받아 1716년(숙종 42)에 건립하였다.

[위치]
충주시 주덕읍 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제내리 풍덕 마을 입구에서 우회전한다. 덕신초등학교 정문이 나타났을 때 왼쪽으로 포장된 길을 따라 음동 마을로 직진하면 왼쪽으로 이상급 묘가 나타난다. 좌회전하여 약 200여m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산자락 밑에 이상급 신도비각이 보인다.

[형태]
팔각형의 대리석 신도비로 대석은 높이 68㎝, 폭 55㎝이며, 동일한 크기의 8면 중 6면에는 연꽃을 조각하였고 대칭되는 2면에는 동물 문양을 조각하였다. 대석의 윗부분에는 8개의 큼직한 연꽃을 새겼고 그 위에 8각형의 비신을 세웠다. 비신은 한 면이 26㎝로 8면의 크기가 동일하고 높이는 약 200㎝ 정도이다. 이수는 비신과 하나의 돌로 구성되었으며 4각의 형태이다. 크기는 78×78×68㎝로 두 마리의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하여 생동감을 보여준다. 8각형이라는 형태의 특이성과 조각의 섬세함과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난 신도비이다.

[금석문]
제액은 예서체로 ‘증이조판서행병조참지이공신도비명(贈吏曹判書行兵曹參知李公神道碑銘)’이라 음기하였고, 비제는 3.5×2.5㎝ 크기로 ‘유명 조선국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 행통정대부 병조참지 이공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正大夫兵曹參知李公神道碑銘幷書)’라 하고, 찬자(撰者)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송시열(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宋時烈)’이며, ‘현손남 진사 정상전(玄孫男進士鋌相 篆)’이라는 글이 있고, ‘진사 정복(進士綎僕)’이 글씨를 썼다.

[현황]
충강공 이상급 신도비가 위치한 사락리 음동 마을에는 경녕군 묘와 신도비, 재실인 명덕사가 마을 왼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함종어씨(咸從魚氏)들의 선산이 그 옆으로 있다. 마을의 중앙에 이상급 묘가 정비되어 있고, 묘의 앞에는 재실(齋室)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산자락을 돌아서 약 100여m 정도 떨어진 곳에 신도비가 위치한다. 이상급 묘 오른쪽 작은 도랑 건너에는 윤증(尹拯)이 찬한 이련(李堜)의 묘갈이 있으나 관리가 소홀하여 송시열과 의를 절단한 윤증과의 관계가 벽진이씨 문중 묘역에서도 증명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