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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강공 이상급의묘( 忠剛公 李尙伋의 墓)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충강공 이상급의묘( 忠剛公 李尙伋의 墓)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4. 6. 21:14

 


충강공 이상급 묘소는 옥로금발형의 대지인데 충강공은 병자호란 때 병조 참지를 지냈는데 난중에 순직한다. 충강공이 이곳에 유택을 만들게 된 것은 충강공의 처가가 이곳 밀양박씨댁이란다.밀양박씨댁과 혼사를 이룰 때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충강공 이상급공이 어려서 장가를 들러 이곳 응동으로 오는 초행길이 멀어서 지금주덕의 소재지인 삼거리 객주집에서 하룻밤을 유하게 된다. 헌출하고 기골이 장대한 신랑 충강공을 본 그 집 주모가 혼자말로 ‘저런 헌출하고 훤훤장부가 무엇이 부족하여 그런 규수에게 장가를 가는고....쯔쯔....아까운 일이야. 참 아까운 일이여?... ’ 이 말을 들은 후객 충강공 형님이신 충숙공 이상길은 신부가 흠이 있어 그렇게 소문이 난 것으로 알고 혼인을 파하고 돌아갈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자 충강공은 ‘형님, 오늘 이렇게 남의 말만 듣고 규수도 보지 않은 채 파혼을 하고 우리가 떠난다면 그 규수는 장차 어떻게 되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봐야 할 일이 아닐지요.. ’ 동생의 신중론에 감명을 받은 형 충숙공은 그날 신부댁에 가서 대례를 하게 되었단다. 알고 보니 신부에게는 어떤 하자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덕(婦德)을 갖춘 훌륭한 규수였고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남편을 공경하며 자녀의 교육에 헌신하는 훌륭한 부인으로 가문을 일으킬 그런 분으로 벽진 이씨 가문에 전하여 오는 이야기가 있다

 

 

 

 

 

 

 

 

 

 

 

 

 

 

 

[정의]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에 낙향한 문신.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사언(思彦), 호는 습재(習齋), 당부(戇夫). 아버지는 동몽교관 이희선(李喜善)이며 어머니는 정환(丁煥)의 딸 창원정씨(昌原丁氏)이며, 형은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이다.

[활동사항]
이상급은 1603년(선조 36)에 진사가 되고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저작·박사 등을 거쳐, 형조좌랑으로 서장관이 되어 나라에 다녀와 평안도사가 되었다. 당시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뜻이 맞지 않아 일시 병을 빙자하여 사직한 일도 있다. 뒤에 형조좌랑을 거쳐 풍기군수가 되었다. 이때는 정조(鄭造)가 경상도관찰사로 있었는데, 그의 속관이 되는 것을 부끄러이 여겨 사직하고 충주 지역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들의 교육에 힘썼다. 형 이상길(李尙吉)도 벼슬을 버리고 함께 후진 교육에 뜻을 같이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장령·집의 등을 역임하고 단천군수·연안군수 등을 거쳐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이 되었다. 이어 병조참지로 치군(治軍), 축성(築城) 등 군비를 확장하는데 힘을 쏟았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군과 싸웠다.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묘사(廟社)를 모시고 강화로 들어간 형 이상길을 찾아가던 중 적병에 살해되었다.

[묘소]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504번지 엄동(奄洞) 몽산(夢山) 아래에 있다. 송시열(宋時烈)이 비명을 지은 신도비가 있는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상급이 순절(1637년. 인조17년. 2월3일)하고 이곳 사락리 유동좌원에 체백을 모시기는 그 해 윤 4월14일이다. 이 묘원에는 부인 밀양박씨도 합장하였다. 아들 이조참의 공(휘 연)을 바로 아래 모셨고 참의공의 부인 전의이씨는 후편에 모셨다. 그 옆에 손자 판서공(휘 지웅)과 부인 경주이씨를 합장하여 모셨다.

[상훈과 추모]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강(忠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