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상당산성
- 보성오씨
- 티스토리챌린지
- 화양동 암각자
- 법주사
- 공주박물관
- 경주김씨
- 사인암
- 선돌
- 부여박물관
- 국립청주박물관
- 단지주혈
- 오블완
- 충주박물관
- 화양구곡
- 각연사
- 문경새재
- 곡산연씨
- 문의문화재단지
- 사과과수원
- 충북의 문화재
- 효자각
- 공산성 선정비
- 밀양박씨
- 청주박물관
- 부도
- 효자문
- 한독의약박물관
- 청풍문화재단지
-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 Today
- Total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이덕량 개척비( 李德樑 開拓碑) 본문
[정의]
조선 중기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충주 입향조.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은 현덕(玄德), 초명은 덕명(德明), 자는 하경(厦卿). 진안대군의 후손으로 슬하에 이연지(李延芝), 이연명(李延蓂), 이연래(李延萊) 3남을 두었다.
[활동사항]
1576년(선조 9) 충청도 괴산에서 태어난 이덕량은 1590년대 현 충주시 주덕읍 제내리로 이주하여 정착한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입향조이다. 관직으로는 행용양위부호군을 역임했다. 이덕량이 충주로 입향한 경위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덕량은 임진왜란 때 돌림병으로 부모를 잃게 되었다. 부모의 묘 자리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집이 가난하고 전란 중이라 어려웠다. 그러던 중 저녁에 과객이 들어서 하룻밤 쉬어가기를 청하였다. 저녁밥을 지을 곡식이 없어 죽을 쑤어 과객을 대접하면서 미안해하자 과객이 괜찮다고 하면서 말하였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보아하니 상을 당하신 것 같은데 묘 자리는 잡으셨는지요? 잡지 못하셨으면 제가 아는 것은 부족하지만 보아드릴 수는 있습니다.”
다음 날 과객을 데리고 묘 자리를 구하기 위해서 돌아다니던 중에 덕면 황금곡리(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어느 곳에 이르게 되었다. 과객이 말하기를 “이곳도 명당이지만 또 한 군데 명당이 있습니다. 그곳은 앉으면 안 보이고 서면 보이는 곳인데 옥관자(玉貫子) 서 말이 나올 자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즉 다른 한 곳은 후손들이 발복하여 벼슬아치가 많이 나오는 명당자리라는 것이었다.
이덕량이 다른 한 곳도 알려 달라고 하니까 과객은 “욕심이 너무 과하십니다. 지금 이 자리도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으로 후손이 만대까지 번성할 자리이니 한 군데만 선택하십시오.”라고 충고하였다. 이덕량은 고관이 많이 나오는 것 보다 자손이 번성하는 것이 더 좋을 것으로 생각하고 처음의 자리를 부모의 묘 자리로 쓰고 충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묘소]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사락리 음동 60-2번지 전주이씨 진안대군파 묘역에 있다. 음동 마을회관 뒷산 골짜기에 입향조 이덕량 묘를 비롯한 다섯 기의 묘가 있다. 후손들에 의해 일명 ‘큰 능 산소’라고 불린다.
[상훈과 추모]
사후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중원의 향기 > 충주시(忠州市)'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재륜 남한강 시비(朴載崙 南漢江 詩碑) (0) | 2010.04.06 |
---|---|
대소원 독립만세운동유적비(大召院 獨立萬歲 遺蹟碑) (0) | 2010.04.06 |
이련의 묘비( 李堜의 墓碑) (0) | 2010.04.06 |
충강공 이상급의묘( 忠剛公 李尙伋의 墓) (0) | 2010.04.06 |
방풍림 비( 防風林 碑) (0) | 2010.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