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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益山 古都里 石造如來立像)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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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益山 古都里 石造如來立像)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5. 4. 09:35

 

고도리 석불입상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46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4.24m, 재료는 화강석이다.

넓은 대좌에서부터 좁은 머리까지 완전히 사다리꼴을 이루고 있는 석불이다. 하나의 사다리꼴 석주(石柱)에다 대좌와 옷무늬, 손과 얼굴 등을 겨우 나타내고 있을 뿐이며 불상이라기보다 마을을 수호하는 무속적인 석상에 가깝다.

머리 위에는 4각형의 뚜껑을 쓰고 있으며 얼굴도 4각형이다. 가는 눈, 짧은 코, 작은 입을 그려넣어 매우 인상적이다. 목은 겨우 하나의 선으로 묘사하고 몸은 사다리꼴 석주에 불과할 뿐, 굴곡이 전혀 없으며 팔도 표현되지 않고 두 손은 간신히 배에 붙이고 있는 상태이다.

비현실적인 조각수법, 그리고 도포 같은 옷이며 두 손을 맞잡고 있는 점 등은 분묘의 석인상(石人像) 문관석(文官石)과 흡사하다. 이 석불은 200m쯤 거리를 두고 서로 바라보고 서 있는 남녀상이다.

 

 

 

석인의 키는 4.2m에 달한다. 키가 크다. 게다가 봉분과 같은 둔덕 위에 서 있어서 발돋움한 듯 쑥 솟아 있다. 그러니까 가는 내내 줄곧 이런 상상을 하였다. 금마의 들판에 서면 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서 있는 두 석인상을 하나의 그림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러나 주변은 논밭과 비닐하우스들로 빼곡해 기대했던 오롯한 그림은 불가능하다. 동고도리 1086번지와 서고도리 400-2번지를 오가며 한 분 한 분 만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사다리꼴의 몸체에 네모난 얼굴, 네모난 갓을 쓰고 있다. 먼 곳을 보려 애쓰는 듯 눈은 가늘게 뜨고 있고, 코는 작고, 입은 살짝 벌린 듯하다. 옷자락은 목에서부터 평행선으로 흘러내려 발등 위에서 좌우로 벌어진다. 팔은 옷자락에 감춰져 있으나 깍지를 낀 듯한, 혹은 겹쳐 놓은 듯한 손이 배 위에 놓여 있다. 간략한 선으로 완성된 모습이다

 

 

내 애인은 바위 속에 누워 있었지

두 손 가슴에 모으고 눈을 감고 있었지

누군가 정(釘)으로 바위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들렸지

내 애인은 문을 밀고 바깥으로 걸어 나왔지

바위 속은 환했지만 바깥은 어두웠지

내 애인은 옛날부터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시 - 안도현]

 

 

 

 

 

이들은 쓰러져 방치되어 있었다 한다. 철종 9년인 1858년에 익산 군수로 부임한 최종석이 이들을 다시 세우고 중건기를 남겼다. 석인상이 불상으로 이름 된 것도 그때부터다. 중건기에는 산으로 둘러싸인 금마에서 유독 남쪽 골짜기만 툭 터져 있어 행여 기운이 새나갈까 읍 수문의 허를 막기 위해 세워둔 것이라고도 하고, 혹은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의 형상이 마치 말의 모양과 같아 마부로 세워 둔 것이라고도 한다. 두 석인은 비보의 수문장이요, 주산을 이끄는 마부였던 것이다.

예전에는 옥룡천 일대가 모두 갈대밭이었고 물길을 타고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밭에 선 그 모습은, 참 무협영화스러웠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나 사랑이 갑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음력 섣달그믐, 이들은 만나 함께 수세(守歲)한다. 밝은 등불은 옥룡천에 비친 별들의 몫이렷다

 

 

 

 

 

 

동, 서, 북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익산 금마면의 들판에 옥룡천이 남류한다. 천을 사이에 두고 두 분 석인이 마주보고 서 있다. 뚝 떨어져, 서로의 얼굴이 아른아른 보일 듯 보이지 않는 200m 거리. 동쪽의 석인은 여자, 서쪽의 석인은 남자다.

이토록 떨어져 마주선 지 근 천년. 그들은 섣달그믐날 자정에 옥룡천 냇물이 꽁꽁 얼어붙으면 그제야 만난다. 서로 끌어안고 일 년의 애달픔을 풀어내다 새벽닭이 울면 헤어져 제자리로 간다. 그날 밤, 옥룡천이 얼어붙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문제없다. 지금은 최단거리 일직선으로 다리가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