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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덕면 병암리 안소당송선생유허비(加德面 屛巖里 安素堂宋先生遺墟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가덕면 병암리 안소당송선생유허비(加德面 屛巖里 安素堂宋先生遺墟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5. 8. 20:12

 

안소당송선생유허비(安素堂宋先生遺墟碑)는 가덕면 병암리에 위치하고있다.

유허비(遺墟碑)라 함은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를 말한다.

비의 상태로 보아 비대석은 후대에 후보된 것으로 보인다.

비의 건립시기는 숭정후4계해년(崇禎後四癸亥年)이면 1863(철종14)년이다.

 

 

 

 

유허란 유지(遺址)·유적(遺蹟)·구기(舊基)와 같이 ‘남긴 터(자취)’·‘옛터’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殉節)하거나 귀양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고려시대까지는 유허비라는 명칭의 비는 보이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유지비(遺址碑)·구기비(舊基碑)라는 명칭의 비가 적지 않게 조성된다. 경기도 개성에 ‘高麗忠臣鄭夢周之閭(고려충신정몽주지비)’라는 문구와 입비연대(1530년, 중종 25)만을 간단히 새긴 비는 유허비의 성격을 띤 초기의 예라고 하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송국헌은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군식(), 호는 안소당()이다. 청주()출신으로 할아버지는 부호군() 송남수()이고, 아버지는 승정원() 도승지()에 증직된 송희진()이다. 벼슬은 자여찰방()을 역임하였다.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덕행이 뛰어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의()를 입고 한양으로 떠났으나 조령()에 이르러 강화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왔다. 사후에 이조참판()에 증직되고, 충청북도 청원군 가덕면 병암리의 검암서원()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청원군 남일면 두산리에 있다.

 

[배향되여 있는 검암서원의 현재의 모습이다]

 

 비석에 글씨를 쓴 송근수(宋近洙)는 조선후기 문신. 본관 은진(恩津). 자 근술(近述), 호 입재(立齋)․남곡(南谷). 우암송시열의 8세손이며 부친은 흠학(欽學)이다. 흠락(欽樂)에게 입양되었다. 1848년(헌종 14) 무신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대사헌․공조판서․병조판서․이조판서․좌찬성․우의정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좌의정이 된 뒤 1882년(고종 19) 5월 정부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교섭에 반대하여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양교(洋敎), 즉 기독교의 폐해를 지적하고 일본 이외의 외국과의 조약체결을 반대하는 한편, 청나라에 파견된 영선사(領選使)의 철환(撤還)도 주장하였다. 퇴직 후에는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며, 저서로는 ?송자대전수차(宋子大全隨箚)?가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송자대전 제150권    
 
 
 명(銘)
 
 
안소당 명(安素堂銘)
 

 


종숙(宗叔) 송군식(宋君式)이 주거하는 집 한가운데 칸에 당(堂)을 만들고 이름을 ‘안소(安素)’라 하였으니, 이는 본분(本分)에 안착하여 그 밖의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 함이다. 내가 듣고 아름답게 여기며 이 명을 지어 보낸다.

빈천 이적과 / 貧賤夷狄
환난 속에서도 / 患難之間
본분에 안착한 이는 / 有素者存
다만 주인(主人)뿐일세 / 惟人素安
저 그렇지 못하는 자는 / 彼不安者
그 밖의 것만을 원한다 / 惟外是願
그것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 願而不得
남을 탓하고 하늘을 원망하는데 / 下尤上怨
이는 다만 남에게 의혹만 받을 뿐 / 秖以取異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 / 何益於事
더욱이 본분이란 명칭은 / 况素得名
소박(素樸)함을 말한 것으로 / 惟質之謂
그림에 있어서는 흰 바탕과 같고 / 在物粉地
덕에 있어서는 충신과 같아 / 德則忠信
이것부터 갖춰져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 後乃施采
여기에는 또한 예를 삼가야 하네 / 禮亦可謹
그중에도 이괘(履卦) / 最是天澤
초구(初九)의 효사(爻辭)에는 / 初九之履
어째서 허물이 없다고 하였던가 / 咎何以無
오직 그 지위가 없음으로 하여 / 惟其無位
물욕에 옮겨 가지 않고 / 不爲物遷
홀로 그 뜻을 지키기 때문이니 / 獨行其志
주공(周公)의 상사(象辭)에 / 聖人象告
더욱 극진히 언급되었네 / 斯其至矣
아 이 당(堂)의 주인을 / 允矣主翁
어느 누가 알아주랴마는 / 孰識其貴
이대로 오래도록 안착한다면 / 苟久能安
본래의 소박함 완성할 것이니 / 終成白賁
이 당에 오를 적마다 / 凡上斯堂
이 편액(扁額)만을 보시구려 / 惟斯扁是視   [한국고전번역원 이기석(역) 1982]

 

 

 

 

자여역은 조선시대 경상도 창원의 자여역(自如驛, 현 창원시 동면 송정리)을 중심으로한 驛道(역도) 이름이다.

 

찰방은 교통과 체신,즉 역리(驛吏)를 포함한 역민(驛民)관리,역마 보급,사신 접대등을 총괄하는 역정(驛政)의 최고 책임자였다.自如道 관할범위는 함안-창원-김해-밀양-양산 방면에 이르는 역로와 창원-웅천-칠원 방면에 이르는 역로이다 이에 속하는 역은 근주(近珠)·신풍(新豊)·안민(安民)·창인(昌仁)·영포(靈浦)·대산(大山)·파수(巴水)·춘곡(春谷)·금곡(金谷)·덕산(德山)·성법(省法)·적항(赤項)·남역(南驛)·보평(報平)등 14개 역이다. 뒤에 덕산역은 황산도(黃山道 : 梁山)로 편입되고, 양동역(良洞驛)이 자여도로 편입되었다. 자여도 소속 역들은 모두 小路,小驛에 속하는 역들이었으며 역도는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존속하였다.

 

[창원부읍지]에 의하면 “찰방 1인, 역리 944인, 노 78인, 비 37인, 대마 2필, 중마 2필, 소마 10필”로 되어 있으며, [영남역지(嶺南驛誌)]에는 “자여도 역관의 터는 창원부 동쪽 20리 전단산 아래에 있다.1592년 임진왜란 후에 역관 터와 거주민들이 모두 회진되었다.그 뒤 1611년에 임진왜란 이후의 유민들이 점차 돌아와 다시 설치하였다.관직은 종6품의 찰방(察訪)이며 屬驛이 14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