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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화창리 군수정화국송덕비(米院面 禾倉里 郡守鄭和國頌德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화창리 군수정화국송덕비(米院面 禾倉里 郡守鄭和國頌德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5. 15. 10:28

 

미원면 화창리 숫골입구에 서있는 이 마을 출신인 군수를 지낸 광주인 정화국의 송덕비이다.

비의 전면에는 군수광주정공화국선생송덕비(郡守光州鄭公和國先生頌德碑)라고 음각되여있으며 비의 측면과 후면에는 정화국의 생전의 업적을 기록하였다

비의 건립은 화창리 주민과 유지일동의 이름으로 서기 1993년 4월 3일에 세웠다. 정화국은 2007년에 작고했다.

화창리는 하천의 상류 지역으로 산지가 많은 편이다. 서쪽과 북쪽으로 산지가 연결되어 있으며 서쪽 산지에서 동쪽으로 작은 하천이 흘러내려가 미원천에서 합류된다. 자연마을에는 거내, 숫골, 아랫말, 요골, 웃말, 작은 한티가 있다. 거내는 마을 앞에 큰 하천이 있어 붙은 이름이고 아랫말은 숫골의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또한 요골은 묘골이라고도 부르며 산세가 매우 묘하게 생겼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숫골은 물이 많은 골짜기인 수골에서 사이시옷이 게재된 어형으로 변화한것이다.

이 마을은 마을의 북쪽인 인경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개울이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마을이 조성되여 있다.

[여지도서]에는 지명이 화동리로 나오고 있다. 화동(禾洞)은 물이 흔해 벼농사를 주로 해왔기에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정화국은 화창리에서 정만수의 아들로 태여나 청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관계에 진출하였다.관계에서 관직이 군수급에 이르게 된다.음성,보은,영동,제천,괴산등 5개소의 군수를 역임하였다.또한 충청북도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는 등 관등이 이사관까지 이르렀다.정화국은 국가에 기여한 공로로 각종 훈장과 표창을 많이 받았다.

 

미원에서 화창리까지의 불편한 도로를 해소하기 위하여 도로개설과 함께 포장을 하여주민들의 교통불편을 해결하여 지역발전과 더불어 학생들의 원할한 통학을 도우므로 지역의 향학에 기여 하였다.

 

 

 

 

 

 

 

 

 

 

광주정씨의 시조 정신호(鄭臣扈)는 고려 충선왕과 충숙왕 때 봉은사 진전직, 판도사사, 상호군을 지내고 삼중대광 문하찬성사에 추봉되었다. 그러나 시조의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고려 말에 정세운은 공민왕을 따라 연경에 다녀와 일등공신으로 대호군이 되었다.

정귀진은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에 이르렀다. 연산군 때 목사를 역임한 정인인(鄭麟仁)과 명종 때 형조참판과 관찰사를 지낸 정만종(鄭萬鍾)도 유명하다. 예조좌랑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정이주도 이름이 났다. 정사호(鄭賜湖)는 선조 때 대사헌, 지의금부사를 거쳐 형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정사위(鄭士偉)는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며, 춘추관 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도승지, 전라부윤 등을 거쳐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참의로 왕을 평양에 호종했다. 영조 때의 화가 정선(鄭敾)은 한국 산수화의 특징을 살린 새로운 화풍을 개척했다. 독립운동가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정춘수(鄭春洙),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규합하여 왜군과 싸운 정용대(鄭用大)도 가문을 빛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정인인(鄭麟仁) : 문과(文科) 연산군4년(1498)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등 모두 102명이 있다. 문과 34명, 무과 4명, 사마시 63명, 의과 1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