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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원면 내산리 효자김은식비(米院面 內山里 孝子金殷植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미원면 내산리 효자김은식비(米院面 內山里 孝子金殷植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5. 22. 06:17

 

미원면 내산리에 위치하고 있는 경주인 김은식의 효자비이다.김은식은 경주인으로서 그의 효행이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여 경주김씨 종친회가 주관이 되여 1993년 효자비를 건립하였다. 비의 내용에 의하면 감천어득의 효(感天魚得의 孝)라 하여 김은식의 효행사실을 기술하고 있다.한겨울에 가물치가 먹고싶디는 어머님의 말에 작은체를 들고 새우라도 잡으려고 냇가엘 나가니 다른곳은 모두 얼음이 얼어 있는데 유독 한군데만 얼음이 얼지않아 얼음이 얼지 않은곳을 보니 고기가 한마리 가만히 있어 얼른 잡고보니 커다란 가물치였다.가물치를 잡아 요리를 해서 드리니 병환이 쾌차하였다 하는 기록이 있다.

한겨울에 물고기를 구하고 또한 고사리등을 구하는 등 하늘의 은총이 없으면 이룰수 없는 일을 하였다.

 

현대의 과학적 사고로는 이해가 되지않는 부분도 있지만 효를 강조하기위한 하나의 일례로 생각할수도 있다.한겨울 얼음을 깨고 잉어가 튀여 오르고 한겨울에 딸기등을 구하거나 죽순등을 구하는등 중국의 효자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가져오면서 사람들의 입으로 구전되며 더 흥미로운 효의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나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효자문이나 효자비의 이야기에는 계절에 맞지않는 과일이나 또는 생선등이 많이 등장한다.한겨울에 딸기라든지 한겨울에 잉어등 물고기를 잡는다든지 하는 현실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많타.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효를 중시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지극한 효의 나타냄을 위하여 그리 하지 않았나 싶다.중국의 고사인 맹종과 왕상의 고사를 인용하여 전국 각처에 비슷한 전설의 효자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공자는 ‘효도와 공경은 인을 행하는 근본’(孝悌也者 其爲仁之本與·논어 ‘학이’편)이라 했다.현대사회를 살면서 삼강오륜을 논할 때처럼이야 어렵겠지만, 돈이나 선물도 좋지만 외롭게 지내는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는 것이 자식 된 도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5월은 가정의 달이다. 정철, 윤선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사문학 대가로 꼽히는 노계 박인로(朴仁老)의 시 한 수가 생각난다.

왕상의 잉어 잡고 맹종의 죽순 꺾어
검던머리 희도록 노래자의 옷을 입고
일생에 양지성효를 증자같이 하리라

조홍시가(早紅詩歌)의 둘째 연으로 중국의 유명한 효자인 왕상, 맹종, 노래자, 증자 못지않게 효도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내용이다.

 

 

 

맹종(孟宗)은 삼국 시대 오(吳)나라 강하(江夏) 사람. 자는 공무(恭武)다. 손호(孫皓)의 자가 원종(元宗)이었는데, 이름을 피해 인(仁)으로 고쳤다. 젊어 스승에게 배웠는데 독서를 하며 밤늦도록 멈추지 않았다.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겨울에 늙은 어머니께서 죽순(竹筍)을 먹고 싶어 했지만 아직 죽순이 나오지 않아서 구할 수 없게 되자 대숲에 들어가서 슬피 우니 땅 속에서 죽순이 솟아나 어머니께 가져다 드렸다고 한다. 처음에 군리(軍吏)로 있다가 오령(吳令)으로 옮겼다. 어머니 상을 듣고 금령(禁令)을 어기고 달려갔는데, 나중에 자수하니 손권(孫權)이 사형에서 감해 주었다. 손휴(孫休) 때 우어사대부(右御史大夫)가 되었다. 손호가 즉위하자 사공(司空)에 임명되었다.

 

왕상(王祥) 삼국 시대 위(魏)나라 말 서진(西晉) 초 낭야(琅邪) 임기(臨沂) 사람. 자는 휴징(休徵)이다. 성품이 지효(至孝)하여 계모(繼母)가 한겨울에 생어(生魚)를 원하자 곧 강으로 가서 옷을 벗고 얼음 위에 누워 얼음을 녹여 고기를 잡으려고 하니 두 마리의 잉어(鯉魚)가 뛰어 나와 잡아 드렸다고 한다. 24효(孝)의 한 사람이다. 후한 말에 난리를 피해 여강(廬江)에서 30여 년 동안 은거했다. 서주자사(徐州刺史) 여건(呂虔)이 불러 별가(別駕)에 임명했는데, 치적을 올렸다. 위나라 고귀향공(高貴鄕公)이 즉위하자 사예교위(司隸校尉)에 임명되었고, 사공(司空)을 거쳐 태위(太尉)에 이르렀다. 진나라에 들어 태보(太保)에 오르고 수릉공(雎陵公)에 봉해졌다. 낭야(琅邪) 왕씨(王氏)는 그와 동생 왕람(王覽)에서부터 명문가로 발돋움했다. 

 

노래자(老萊子)

는 초(楚)의 효자. 나이 70이 되도록 양친이 살아 있어서 어버이를 즐겁게 하려고, 그 앞에서 어린애 노릇을 하여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거나 물 그릇을 들고 가다가 자빠져서 엉엉 울기도 하며 온갖 재롱을 부렸다 함.

明朝拜嘉慶 須著老萊衣(명조배가경 수착노래의 ; 내일 아침 경사를 절하며 뵐 때, 모름지기 노래자의 색동옷을 입으리.)<맹호연孟浩然 석차채양관夕次蔡陽館> 莫遑賦淵明之歸來 其敢效老萊之匍匐(막황부연명지귀래 기감효노래지포복 ; 도연명과 같은 귀거래사를 지을 겨를이 없었는데, 감히 노래자의 어버이 앞에서 어린애처럼 기어다니던 재롱을 본뜰 수 있었겠습니까?)<정지상鄭知常 사사물모씨표謝賜物母氏表>

 

 

증자(曾子)

는 이름은 삼(參, 참이라고 부르기도 함),

자는 자여(子輿)이며, 산동성[山東省]에서 출생하였다. 증점(曾點)의 아들이다. 공자(孔子)의 고제(高弟)로 효심이 두텁고 내성궁행(內省躬行)에 힘썼으며, 노(魯)나라 지방에서 제자들의 교육에 주력하였다.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나의 도는 하나로써 일관한다(吾道一以貫之)”고 말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그 말의 참뜻을 몰라 생각에 잠겼으나, 증자는 선뜻 ‘부자(夫子)의 도는 충서(忠恕)뿐’이라고 해설하여 다른 제자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효경(孝經)》의 작자라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현재 전하는 《효경》은 진한시대(秦漢時代)에 개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증자의 사상은 《증자(曾子)》 18편(篇) 가운데 10편이 《대대례기(大戴禮記)》에 남아 전하는데, 효(孝)와 신(信)을 도덕행위의 근본으로 한다. 그는 공자의 도(道)를 계승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를 거쳐 맹자(孟子)에게 전해져 유교사상사(儒敎思想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공자·안자(顔子)·자사·맹자와 함께 동양 5성(五聖)으로 꼽힌다.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