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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송정리 연충수묘소(道安面 松亭里 延忠秀墓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도안면 송정리 연충수묘소(道安面 松亭里 延忠秀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5. 30. 07:54

 

초여름의 날씨와 알맞은 기후는 이제 막 땅냄새를 맡은 어린모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지 어린모들의 색깔이 싱그럽다

그래서 그럴까 곡산인 연충수의 묘소에서 바라보는 송정리 통미마을이 참 평화로와 보인다.

 

 

안음공(安陰公) 연충수(延忠秀: 1557~1621)의 묘소는 송정2리 ‘통미’ 뒤편 골짜기 ‘법곡(法谷)’에 있다. 길 왼쪽에 있는 신도비 비각에서 언덕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그의 묘소와 아들 연심(延瀋)의 묘소가 있다. 그의 신도비는 영조 31년(1755)에 사헌부대사헌겸세자찬선(司憲府大司憲兼世子贊善)

민우수(閔遇洙: 1964~1756)가 짓고 정산현감(定山縣監) 채복휴(蔡復休)가 쓴 것을, 영조 50년(1774)에 세운 것이다.

 

 

 

문석인 2점과 더불어 근래에 새로만든 호석을 두르고 상석등을 갖추었다.

조금은 오래된 비석과 근래에 새로 제작된 비석이 좌우로 자리하고있다.

 

 

연충수(延忠秀: 1545∼1621)는 자는 성백(誠伯), 본관은 곡산,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교위공 정우이고, 생부(生父)는 사과공 정원이다. 한강(寒崗) 정술(鄭述)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나,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았다.
효성이 돈독하고 신의가 두터워 향리에서 칭송이 자자했다.선조조(宣祖朝)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청안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 싸워 향리를 지켰으
며 왜적이 물러간 후 걸어서 행재소(行在所)에 이르자 선조께서 친히 보시고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에 임명됐다. 내섬시 주부(內贍寺主簿)를 거쳐 중림도 찰방(重林道察訪)), 안음현감(安陰縣監) 등을 역임했다.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이 그를“효우충절(孝友忠節)”이라 칭찬했으며, 찰방 시절에도 선정을 베풀어 역인(驛人)이 그 덕을 칭송하고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향교를 보수하여 유생들을 교육했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산불을 놓아 적이 겁을 먹고 달아나게 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고향에서 후학양성에 힘쓰다가 광해군 13년(1621)에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묘소는 증평군 도안면 송정리 통미의 뒷산 언덕 법곡에 있다.


 

 

 

 

 

 

통덕랑을 지낸 연충수의 아들인 연심(延瀋)의 묘소이다.

 

곡산 연씨(谷山 延氏)의 시조 연계령(延繼岺)은 중국 흥농 사람으로서 고려 때에 한국에 와서 문하시랑(門下侍郞)과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연계령의 7세손인 연수창(延壽菖)이 고려 충렬왕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여 고려에 와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ㆍ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하고 곡산(谷山)에 정착하였다

 

곡산(谷山)은 황해도 북동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십곡성(十谷城)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진서(鎭瑞)로 고쳤고 고려초에 곡주(谷州)로 개칭하였다. 1393년(조선 태조 2)에는 곡산으로 개칭하고 부(府)로 승격하였다. 조선 1895년에 곡산군이 되었으며, 별칭은 덕둔홀, 고곡, 진서, 상산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