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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율리 김 치묘(曾坪邑 栗里 金緻 墓)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증평읍 율리 김 치묘(曾坪邑 栗里 金緻 墓)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7. 23. 06:02

 

증평읍 율리에 자리하고 있는 김득신의 아버지인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김치의 묘이다.신도비와 문인석과 망주석 동자상이 자리하고 있다.

 

 

 

김 치는 1577(선조 10)∼1625(인조 3).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심곡(深谷). 석(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충갑(忠甲)이고, 아버지는 부사 시회(時晦)이며, 어머니는 양언개(楊彦漑)의 딸이다. 증 영의정 시민(時敏)에게 입양되었다.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설서(說書)를 거쳐 1608년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예부흥을 위하여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하였다. 광해군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이조참의·동부승지·대사간을 거쳐, 교리(校理)·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고, 병조참지에 올랐으나 독직사건으로 파면되었다.
한때 이이첨(李爾瞻)의 심복으로 이조에 있으면서 흉한 일을 벌였으며, 대사간이 되어서는 영창대군(永昌大君) 살해음모를 반대하는 정온(鄭蘊)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짐을 깨닫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인조반정이 있을 무렵 심기원(沈器遠)과 사전에 내통하여 벼슬길에 다시 올랐으나, 대북파(大北派)로 몰려 유배당하였다. 그 뒤 풀려나 동래부사를 거쳐 1625년(인조 3)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어릴 적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경서(經書)에 통달하였고, 특히 점술을 연구하여 천문(天文)에 밝았으나 재물을 탐내어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심곡비결(深谷祕訣)』이 있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율리[밤티]에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의 아들 병조참의 김치(金緻)의 묘가 있다. 김치는 조선 숙종 때의 청백리(淸白吏)로 경상도부사(慶尙道府使)를 지내다가 죽었다. 김치가 임지에서 운명을 달리했기 때문에 빠른 길을 택해서 한양까지 운구를 해야했다. 그래서 분티재를 택했다. 분티재는 영남의 대로(大路)로서 경상도에서 보은(報恩), 미원(米院)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최고의 지름길이었다. 그래도 한양까지 운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분티재를 넘을 때에 상여꾼들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쉬어가기를 반복해야 했다. 상여꾼들이 잠시 분티재에서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 김치의 상여와 함께 만사(輓詞)를 수십 여 개 대동했는데, 갑자기 바람이 휘몰아치더니 만사 하나가 하늘로 날아 올랐다. 상여꾼들이 놀라서 날아가는 만사를 쫓아 3∼4km 가량을 허겁지겁 달렸다. 만사는 밤티에 이르러 내려 앉았다. 이러한 사실 의아하게 여긴 상주가 지관에게“이곳 자리가 어떠냐?”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지관이“이 곳은 최고의 명당입니다”며 아뢰었다. 이에 만사가 내려앉은 바로 그 곳을 김치의 묘로 삼았다. 그리고 후손들이 이 곳에 정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