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김득신 묘비와 동자석(金得臣 墓碑와 童子石)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김득신 묘비와 동자석(金得臣 墓碑와 童子石)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7. 23. 10:25

 

증평읍 율리에 있는 김득신의 묘에 있는 묘비와 동자석과 망주석이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었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려 있을 뿐이다(無以才不猶, 人自畫也. 莫魯於我, 終亦有成. 在勉强而已).” [묘비내용중 일부 발췌]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율리(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栗里)에 자리한 김득신묘소에 있는 김득신묘갈(金得臣墓碣)이다. 1688년(숙종 14년)에 세워진 이 묘갈의 묘갈문은 이현석(李玄錫)이 짓고, 글씨는 김득신의 9촌 조카인 김봉지(金鳳至)가 쓴 것으로, 원문이 김득신의 문집인 『백곡집(柏谷集)』부록에도 남아 있다. 김득신(1604~1684년)은 10살 때 비로소 글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노둔한 편이었지만, 아버지 김치(金緻)의 가르침과 훈도를 받아 시명(詩名)을 떨친 인물이다. 당대의 한문사대가인 이식(李植)과 김류(金瑬)에게서 ‘문단(文壇)의 제일인자’로 평가받기 시작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642년(인조 20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62년(현종 3년)에 이르러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예조원외랑(禮曹員外郞)과 강원도사(江原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金得臣 墓碣
安豊君金公之墓 
公姓金 諱得臣 字子公 號栢谷 安東人 安興君諱緻之子也 以萬曆甲辰十月十八日生 其生也 安興君夢見老子 故幼名夢聃 幼而魯十歲始就學 十九史畧首章僅二十六字 而三月不能口讀 安興公猶且勤誨之曰 是兒命直文曜長必大以文鳴於世也 公亦諄謹不好弄讀書不怠 九年學略解其蒙時作聯語輙警拔 翌歲安興公宰東萊行戒之曰 若勉讀書毋妄交遊公遂閉戶日孜孜講誦期而覲進所製詩 安興公喜曰 文己發軔矣力攻之遠就也 公始聞奬賞語喜甚而舞 乙丑丁安興君憂服闋而其文益肆先軰屈膝華聞丕振詩甚高潔淸踈調新 而格奇潭堂李公植北渚金公瑬競許騷壇第一當華使時見推以白衣製逑官 官即權石洲舊也 龍湖漢江等作至荷宸褒世以爲榮平生讀古書極勤若負笈山寺 二十年有不讀讀必數萬遍於伯夷傳 則至數十萬 仍名小齋曰億萬 獨其科擧文與俗尙詭屢進屢屈 以安興君命限六十 應擧壬午中司馬 壬寅登文科 由成均學諭陞典籍旣直公館出語人曰 昨吾冒風寒冷透骨旣直盧煖如火欲汗此造化也 人而久檀造化權不祥我將歸矣 識者謂足以警世云 遂歸槐壤築舍于開香山先塋側扁曰醉默 詩酒自娛除拜不就 或强起一謝 成均之直講司藝憲府掌令兵工禮曺員外濟用司僕掌樂軍資宗簿司導正槐院判校江原都事豊基洪川旌善等宰 是公履歷 而又預知製敎選其得邑也 朝議以公騷人濶於事沮之 公少甞蔭補叅奉 以大夫人在故勉赴官俄棄之 辛酉用世勳陞通政 癸亥以優老典階嘉善襲封安豊君 甲子秋患泄痢且病疽八月卄九捐館壽八十一 始公善相人多奇驗自謂相有兵死法惟修飭儻可免病卓華昏迷怱曰 吾頰有刃痕否適會家人先備殮襚衣衾有惡少輩夜指兵入劫取之 公己冥然刃遇類頰而不省仍遂屬纊其前知多類此訃聞賜祭賻如儀葬 在淸安縣左龜山壬坐之原 從先北也 公相貌奇古炎禀淸高 如方外士於世味泊如也家居屢空萎如也 無一點塵俗態甞言 吾不欺心不欺人言必副約必踐不作皺眉事不走權貴門是一生心跡也 又勉學者無以才不猶人自晝也 莫魯於我終亦有成在勉强而己 若才具不廣當致精於一一而成勝於傳而無成者 此皆公所自得也 公質行尤篤有庶母性悖公待以至誠竟底感化鄕先生朽淺黃公宗海甚重公而賢之 久堂朴尙 書長遠少學於安興公與交至讙一日値公初廣却酒食悌泣曰 吾思久堂心怱然若失意者其殆乎及訃至果以其日逝公之著述甚富多散佚於丙子亂 見存僅千篇 酷好山水遊如小剛山白馬江及湖西四郡等地杖屢進迨詩具存可以觀焉 且嗜草聖酣醉無聊必揮灑兩遺興焉未甞示人故世無知者 公係出新羅 有高麗上洛伯方慶爲十四代祖 高祖諱錫 進士贈領議政愍巳卯士禍隱不仕 曾祖諱忠甲 指平贈左贊成 祖諱晦文富平府使贈典翰 考安興公後其季上洛府院君寔諱時敏 死節於晉戰功殊惰錄宣武勳 贈領議政安興公號南峯卒官嶺南伯 以公推恩贈亞銓 妣泗川睦氏 吏曺叅判詹之女 公配金氏籍慶州考聲發掌令 贈都丞旨冲蓭先生四世孫也 擧三男二女男 長天柱 贈夷判娶 贈吏叅柳成厦女生四男 可敎別提可訓可行縣監可聲一壻朴沔 次天挺 娶廣寧君李繼道女 生五男 可遠可近叅奉可迪虔監察可尙一 壻崔烻次天揆娶李承淵 女長適判決事崔渲有子起昌 壻典籍權惺次適郡守李重輝有子濂內外孫曾合數十八 銘曰
無懷葛天之民老杜兮 郊之詩行心八十年兮 如一日讀書億萬數兮 奇之又奇四尺之墳兮
千古之名九原難作兮 噫
崇禎紀元後六十一年戊辰八月 日 
通政大夫行兵曺叅議知製敎 李玄錫 撰 
九寸侄 通訓大夫行司僕寺主簿 金鳳至 書

 

 

 

안풍군(安豊君) 김공(金公)의 묘(墓)

공(公)의 성은 김(金)이요, 자(字)는 자공(子公)이며, 호는 백곡(栢谷)으로, 안동(安東) 사람이다. 안흥군(安興君) 휘(諱) 치(緻)의 아드님이다. 만력(萬曆) 갑진년(선조 37, 1604년) 10월 18일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안흥군은 꿈에서 노자(老子)를 보았는데, 그리하여 어렸을 때의 이름을 노자의 이름인 담(聃)을 넣어 몽담(夢聃)이라 하였다.
어려서 노둔하여 10세에 비로소 취학하였는데, 십팔사략(十八史略 -- 역자주 : 원문은 십구사략이나 오기로 생각되어 수정함)의 첫 장에 나오는 고작 스물여섯 글자를 석 달이 되도록 입으로 읽지를 못했다. 안흥공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지런히 가르치며 이르기를, “이 아이는 명(命)이 곧고 문(文)이 빛을 발하니, 자라서는 반드시 큰 인물이 되어 세상에 문장으로 이름을 울릴 것이다.” 하였다. 공 역시 정성스럽고 삼가서 장난삼아 글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글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9년 동안 배워 대략 그 몽매함을 풀었으며 때때로 시를 지었는데 그때마다 착상이 독특하고 뛰어났다. 다음 해에 안흥공이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제수되었는데 길을 떠나면서 당부하여 이르기를, “부디 글 읽기에 힘쓸 것이며 친구들과 함부로 어울려 놀러 다니지 말거라.” 하였다. 공은 드디어 문을 닫아걸고 날마다 부지런히 강송(講誦)하여, 1년 만에 시를 지어 바칠 수 있게 되었다. 안흥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문장이 이제 막 제 길에 접어들었다. 노력하여 공을 들이면 멀리까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재능을 장려해 주고 인정해 주는 말을 처음 듣고서 몹시 좋아하여 춤을 추었다.
을축년(인조 3, 1625년)에 안흥군이 세상을 떴다. 복상(服喪)을 마치고 나자 그 문장이 더욱 자유자재로 표현을 구사할 수 있게 되어 선배들이 무릎을 꿇을 정도였으며 아름다운 명예가 크게 떨쳐졌다. 시는 매우 고결하고 맑고 소탈하였으며, 리듬감이 있고 표현 기법도 새로웠다. 그리하여 담당(潭堂) 이공(李公) 식(植)과 북저(北渚) 김공(金公) 류(瑬)가 경쟁적으로 ‘문단(文壇)의 제일인자’라고 허여하는 등의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현귀(顯貴)한 관리의 추천을 얻어 백의(白衣)의 신분으로 제술관(製述官)에 올랐는데, 관직에 제수될 수 있었던 것은 권석주(權石洲)의 덕택이었다. ‘용호(龍湖)’, ‘한강(漢江)’ 등의 작품은 임금의 포상을 받는 데까지 이르러 세상에서 영화롭게 여겼다.
평소에 옛 글 읽기를 지극히 부지런히 하여 책 상자를 메고 산사(山寺)에 들어가기를 20년간 하였는데 읽지 않은 글은 있었어도 읽었다 하면 반드시 수만 번을 읽었다. 백이전(伯夷傳)의 경우에는 수십만 번을 읽어서 인하여 자그마한 서재의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고 지었다.
유독 과거(科擧)의 글이 시속(時俗)의 글과 대체로 달라서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여러 번 낙방하였다. 안흥군이 60세가 될 때까지 과거를 볼 것을 명하였다. 임오년(인조 20, 164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임인년(현종 3, 1662년)에는 문과에 급제했다.
성균관 학유(學諭)를 거쳐 성균관 전적(田籍)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공관(公館)에서 숙직을 하고 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젯밤 내가 바람과 추위를 무릅쓰느라 냉기가 골수에 스몄는데 곧이어 화롯가에 갔더니 따듯하기가 불과 같아서 땀이 날 지경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조화(造化)를 부리는 것이다. 사람이 오랫동안 관직에 있으면 조화를 제멋대로 부리게 된다. 권력은 상서로운 것이 아니니, 나는 장차 돌아가련다.” 하였다. 식자(識者)들은 이 말이 족히 세상에 경종이 될 만하다고 여겼다.
드디어 괴산(槐山) 땅으로 돌아와 개향산(開香山) 선영(先塋) 옆에 집을 짓고 편액을 걸기를 취묵당(醉黙堂)이라 하였다.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거워하여 관직에 제수되어도 나아가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벼슬길에 나설 것을 강권(强勸)하였으나 한결같이 사양하였다.
성균관의 직강(直講)과 사예(司藝), 사헌부의 장령(掌令), 병조 공조 예조의 원외(員外), 제용감(濟用監), 사복시(司僕寺), 장악원(掌樂院), 군자감(軍資監), 종부시(宗簿寺)의 사도시(司導寺) 정(正), 괴원 판교(槐阮判校), 강원 도사(江原都事), 풍기(豊基), 홍천(洪川), 정선(旌善) 등지의 수재(守宰), 이것이 공이 거친 이력(履歷)이다. 또 지제교(知製敎)로 있으면서 읍재(邑宰)로도 선발되었는데, 조정의 의논은 공이 시인(詩文)이기 때문에 일에 있어서는 꼼꼼하지 못하고 어설플 것이라 하여 그것을 저지하였다.
공은 소싯적에 일찍이 음관(蔭官)으로 참봉(參奉)에 임명되었는데 대부인(大夫人)이 계실 때라 힘써 관직에 달려갔으나 얼마 안 있어 그만두었다.
신유년(숙종 7, 1681년)에 가문의 공(世勳)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계해년(숙종 9, 1683년)에 노인을 우대하는 전례(典禮)에 의해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안풍군(安豊君)으로 습봉(襲封)되었다. 갑자년(숙종 10, 1684년) 가을에 설사병을 앓다가 병이 악화되어 8월 29일에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향년 81세였다.
애초에 공은 남의 관상을 잘 보아 기이하게 들어맞는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 자신의 관상에 대해 말하기를 “흉기에 찔려 죽을 상이나, 수칙(修飭)을 잘하면 면할 수는 있겠다.” 하였다. 나중에 병이 갑자기 생겨 정신이 혼미할 즈음에 홀연 말하기를, “내 뺨에 칼자국이 있는가?” 하였다. 그 무렵 때마침 집안사람이 염습할 때 쓸 옷과 이불을 미리 갖추어 두었는데, 나이어린 불량배가 밤에 칼을 들고 들어와 겁을 주고 그것들을 가져갔다. 공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는데 불량배의 칼이 우연히 공의 뺨을 스쳐 자국이 남게 되었는데, 살피지 않고 그대로 염습하였으니, 그 미리 예견한 사례가 이와 같은 것이 많았다.
공의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사제(賜祭)하였으며 부의(賻儀)를 보내기를 의장(儀葬) 때와 같이 하였다. 공의 묘소는 청안현(淸安縣) 좌구산(坐龜山) 임좌(壬坐)의 언덕에 있는데 선영을 따른 것이다.
공의 모습은 기이하고 고풍스러웠으며 아름답고 고상하며 맑고 고고하여, 마치 세속을 벗어난 선비가 세상일에 담박하고 집안 살림이 자주 궁하고 딱한 것과 같았으며, 속된 태도가 한 점도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내 마음을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았으며, 말을 함에는 반드시 간략함을 따랐고 반드시 실천하였으며, 빌붙고 아첨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권세 있는 자와 부유한 자의 문전으로 달려가지 않았으니, 이것이 일생을 지낸 마음의 자취이다.” 하였다.
또 배우는 자들을 권면할 때 재주로써 권면하지 않고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설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써 권면하였으니, “나보다 노둔하지 않다면 종국에는 역시 나름대로 성취함이 있을 터이니, 부지런히 힘쓰는 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 만약 재주는 갖추고 있으면서 하나하나 정밀하게 살펴야 할 곳에 맞닥뜨려 넓혀 가지 않고서 성취하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보다 성하여서는 성취가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는 모두 공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공은 자품이 질박하였으며 행동도 또 독실하였다. 서모(庶母)가 성품이 패악스러웠는데 공이 지성으로 대하여 마침내 감화시켜 향선생(鄕先生) 후천(朽淺) 황공(黃公) 종해(宗海)가 공을 심히 중하게 받들고 어진 사람으로 대우하였다. 구당(久堂) 상서(尙書) 박장원(朴長遠)이 어려서 안흥공에게 배우며 공과 사귀었다. 어느 날 공이 술과 음식을 물리치고서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구당(久堂)을 생각함에, 마음으로 홀연히 그를 잃어버린 것 같으니, 생각건대 그가 위독한 모양이로다.” 하였다. 곧이어 부음이 이르렀는데 과연 그날 구당이 세상을 떴다.
공의 저술은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데 병자호란 때에 흩어져 잃어버리고 말았다. 현존하는 것은 겨우 천 편이다. 산수(山水)에 노닐기를 몹시 좋아하여 소강산(小剛山), 백마강(白馬江) 같은 곳과 호서(湖西)의 네 개 군(郡) 등지를 지팡이를 짚고 한가하게 거닐며 나아가 이르렀다. 이때 지은 시가 모두 남아 있어 볼 수가 있다. 또 초서(草書) 쓰기를 좋아하여 술이 잔뜩 취해 무료할라치면 반드시 붓을 휘둘러 흥을 남기곤 했는데, 일찍이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법이 없어서 세상에 아는 자가 없었다.
공의 계보(系譜)는 신라에서 나왔는데 고려 시대 상락 백(上洛伯)이었던 방경(方慶)이 공의 14대조가 된다. 고조부인 휘(諱) 석(錫)은 진사로 영의정에 증직(贈職)되었는데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안타깝게 여겨 은거하고서 벼슬하지 않았다. 증조부인 휘 충갑(忠甲)은 지평(持平)인데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조부인 휘 회문(晦文)은 부평 부사(富平府使)로 전한(典翰)에 증직되었다. 선고(先考)인 안흥공(安興公)은 작은아버지인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곧 휘 시민(時敏)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상락부원군은 진주(晉州) 전투에서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공이 남달리 뛰어나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안흥공의 호(號)는 남봉(南峰)인데 영남 백(嶺南伯)으로 관직을 마쳤기 때문에, 은혜를 미루어 붙인 것이다. 아전(亞銓 : 이조 참판을 가리킴)에 증직되었다.
선비(先妣)는 사천 목씨(泗川睦氏)인데, 이조 참판인 첨(詹)의 따님이다. 공의 배필은 경주 김씨(慶州金氏)이며, 그 아버지 휘 성발(聲發)은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도승지에 증직되었으며 충암(沖庵) 선생의 4세손이다.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천주(天柱)인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으며 유성하(柳成廈)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넷을 낳았으니, 장남은 가교(可敎)로 별제(別提)이며, 차남은 가훈(可 訓)이며, 셋째 아들은 가행(可行)으로 현감(縣監)이며 넷째 아들은 가성(可聲)이다. 사위는 하나인데 박면(朴沔)이다.
차남 천정(天挺)은 광녕군(廣寧君) 이계도(李繼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장남은 가원(可遠)이며, 차남 가근(可近)은 참봉이며, 셋째 아들 가적(可迪)은 감찰(監察)이며, 넷째 아들은 가건(可虔)이며, 다섯째 아들은 가상(可尙)이다. 사위는 하나인데 최연(崔烻)이다.
셋째 아들 천규(天揆)는 이승연(李承淵)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판결사(判決事) 최선(崔渲)에게 시집가서 아들을 두었으니 기창(起昌)이며 사위는 전적(典籍)인 권성(權惺)이다.
차녀는 군수(郡守) 이중휘(李重輝)에게 시집가서 아들 렴(濂)을 두었다. 내외의 손자와 증손을 합쳐 18명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무회(無懷), 갈천(葛天)의 백성인 노두(老杜)여
교외에서 시 짓기 팔십 년이로다
매일같이 글 읽기를 억만 번 하였도다
기이하고 기이하다 네 척(尺)의 봉분이여
천고의 이름을 저승에선 이루기 어렵겠지,
아아, 슬프도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61년 무진년(숙종 14, 1688년) 8월 일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병조참의 지제교 이현석(李玄錫) 짓다.
9촌 조카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司僕寺) 주부(主簿) 김봉지(金鳳至) 쓰다.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팔순에 명화적 칼에 희생…숙종도 큰 관심 - 충북과 나의 연결고리 '충북일보' (inews365.com)

 

팔순에 명화적 칼에 희생…숙종도 큰 관심

증평 율리 삼거리에서 좌구산 방향으로 달리면 삼기저수지가 나오고, 여기서 더 진행하면 율리 마을회관이 나타난다. 이 마을 뒷산에 백곡 김득신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증평군청 자료는 백곡

www.inews365.com

 

 

 

 

 

김득신의 묘는 동자석(童子石)이 좌우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봉분이 그리 높지 않는 등 비교적 소박한 외형을 하고 있다. 석인(石人)의 일종인 동자석은 16-18세기 원·묘에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진 독특한 묘제 조형물이다.

 

 

 

 

동자석은 무덤 주인공인 묘주(墓主)를 가까이서 공손히 모시는 것에 그 의미가 부여돼 있다. 당나라 가도의 한시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으니 / 스승은 약초 캐러 갔다네 / 다만 이 산 속에 계실 터이나 / 구름이 깊어 계신 곳을 알 수 없다네'에 등장하는 그런 동자를 떠올리면 된다.

따라서 동자석은 묘지 공간내 여러 석인(石人) 중 묘주 가장 가까이 자리잡는다. 김득신 묘의 동자석도 그런 위치에 있으면 쌍계(쌍상투)를 틀고 무엇인가를 모은 손에 쥐고 있다. 이른바 지물이다.

이 지물에 대해서는 대체로 조선시대 궁궐 출입시 대신들이 양손을 모아 쥐었던 '홀'(笏)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미술사적으로 봐도 동자석 지물은 연꽃, 홀에 이어 양손을 모으는 모습으로 변했다.

18세기 조선사회에는 예학사상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비성리학적인 요소들은 모두 배척을 당했다. 동자석도 그런 시대 분위기에 휩쓸렸고 이후 문인석과의 석물 경쟁에서 패배,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김득신묘 동자석은 그 전에 세워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김득신이 동자석 옆 묘비명을 생전에 이렇게 써놓았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사람도 없었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데 달렸을 뿐이다.'(無以才不猶 人自畵也 莫魯於我 終亦有成 在勉强而己)-<김득신 묘비명>
  

 

 

 

증평읍 율리의 김득신 묘소와 이야기길. (tistory.com)

 

증평읍 율리의 김득신 묘소와 이야기길.

증평읍 율리에 가면 백곡 김득신의 이야기길이 있다.율리마을 회관에서 김득신의 묘까지 길지 않은 길이지만 백곡 김득신의 발자취를 느낄수 있다.백곡 김득신(1604~1684)은 17세기 대표 시인으로

king6113.tistory.com

 

 

 

 

괴산읍 능촌리 취묵당 현판(槐山邑 陵村里 醉默堂 懸板) (tistory.com)

 

괴산읍 능촌리 취묵당 현판(槐山邑 陵村里 醉默堂 懸板)

괴산군 능촌리에 있는 김득신이 지은 취묵당에 걸려있는 각종 현판들이다. 전국문화유적총람에 보면 취묵당은 (醉默堂)은 <<괴산군읍지>>에 취묵당재군동십리(醉默堂在郡東十里)이라 하였듯이

king6113.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