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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율리 김 치 신도비(曾坪邑 栗里 金 緻 神道碑) 본문
증평읍 율리에 있는 안동인 김 치의 신도비이다.
심곡비결(深谷秘訣)이라는 책은 자미두수 책중에서 좀 특이한 내용이 많다. 설명하자면 자미두수란 하늘에 있는 별들을 이용해서 사람의 운명을 미리 예측하는 방법이다.
김치 선생과 자미두수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남산골에 사는 김치선생에게 심기원이라는 사람이 인조반정이란 거사를 앞두고 이름은 밝히지 않는채 능양군 ( 후에 인조대왕 )의 사주를 가지고 와서 추수 ( 推數 ) 를 부탁하였다 .
김치선생은 추수를 하다가 갑자기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무릎을 꿇고 명반 (자미두수로 추수를 하기 위해 생년월일를 기초로 작성한 반 ) 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김치선생은 자미두수로 극비의 거사를 알고 이미 잡은 거사일자를 좋은 길일로 다시 택일을 해주기도 하였다.
물론 거사는 성공하여 인조는 왕으로 등극하였다는 이야기가 역사서에 전해온다.
이후에 김치선생은 한때 곤경에 몰린적이 있었는데 심기원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았고 경상도 감사에 임명되는 영광도 누렸다 .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율리(忠淸北道 曾坪郡 曾坪邑 栗里)에 자리한 김치묘소에 있는 김치묘갈(金緻墓碣)이다. 1674년(현종 15년)에 세워진 이 묘갈의 묘갈문은 그의 아들 김득신(金得臣)이 짓고, 글씨는 손녀사위(孫壻)인 최선(崔渲)이 쓴 것이다. 김치(1577~1625년)는 1597년(선조 30년)에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병조좌랑(兵曹佐郞), 이조참의(吏曹參議)와 병조참지(兵曹參知) 등을 역임하였으며, 광해군의 학정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대북파(大北派)로 몰려 유배를 당하였으며, 유배에서 풀려나 동래부사(東萊府使)를 거쳐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묘갈문에는 그의 가계(家系)와 관력(官歷), 그리고 가족사항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金緻 墓碣
安興君安東金公之墓
公姓金 諱緻 字士精 號南峯 十三世祖高麗上洛公諱方慶 以功食采于安東新羅敬順王後也 傳十一世諱忠甲 司憲府持平贈議政府左賛成 公之大考也 初娶翰林金神童女 生諱時晦 丁卯登第秉史筆而名位不大 公之考也 再娶內禁衛李成春女 生諱時覺時敏時愼時進時敏 娶學生徐應文女 無子 以晋州判官値海冠與戰大剋之
陞拜兵馬節度使 又大戰賊三敗北親自巡城竟中流丸而卒 以豊功茂著 贈領議政封上洛君 公之養考也 考配尙衣院直長楊彥漑女 以萬曆丁丑七月初七日生公 公生而魁傑記性甚聰敏 丁西捷謁聖科爲承文正字 己亥以春坊說書陞司書 轉拜兵曺佐郞弘文館修撰司憲府持平 出宰海美興德恩威并施吏戢而民慄 戊申復入玉堂 薇垣轉爲吏曺佐郞 兼賜暇湖堂 己酉除濟州判官廉直指身廊草苛政瘦珉 乃蘇歷成均司藝宗簿司僕正 癸丑爲嶺南均田使正田役 入爲兵曺叅知司諫院大司諫吏曺叅議 乙卯丁養大夫人喪 戊午除兵刑工叅議承旨 皆不就當是時光海政亂倫歝廢大妃之論起公惰惋大言曰 此何等時乎遂居龍湖足不到城市者大年詩酒自娛逮仁祖反正以東萊爲接倭重地 拜公府使不但爲才局但不于廢妃故也 公視民如傷删其衆弊民鑄銅碑立待倭宴餉之饌精潔歲幣之給亦得其宜倭亦感德送寶釼奇器 乙丑爲慶尙道觀察使宿病復欲五月二十七日卒于客舍 得年四十九 葬淸安縣南栗峙 丁酉夫人以疾終葬 公之墓左 公宇量沉深喜溫不形於色宏略出衆一松沈相喜壽 以公可爲都帥薦之盖從時議 配吏曺叅判睦詹女 生一男得臣 文科掌令 娶掌令金聲發女 生男女五 一男天柱娶學生柳成厦女 生四男一女而早死 二女歸文科縣監崔演 生二男二女 三男天挺 娶進士李繼道女生五男一女 四女歸縣監李重輝生一男 五男天揆 娶幼學李承淵女 生三男一女 副室出 長曰得岭爲司馬 次曰得成得平 鳴乎 至情無文只序列世系子孫不記事實 則後人何觀焉男 通訓大夫行掌樂院正兼知製敎 得臣 撰 孫婿 通政大夫掌隷院 判決事 崔 演 書
崇禎紀元之四十七年甲寅 九月 日 立
김치묘갈(金緻墓碣)
공의 성은 김(金)이요, 휘(諱)는 치(緻), 자(字)는 사정(士精)이며 호는 남봉(南峯)이다. 13세조인 고려 상락공(上洛公) 휘 방경(方慶)이 공을 세워 안동(安東)에 채읍을 받았으니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이다. 11세조인 휘 충갑(忠甲)은 사헌부 지평으로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니 공의 대고(大考)이다.첫 부인은 한림(翰林) 김신동(金神童)의 따님으로 휘 시회(時晦)를 낳았다. 정묘년에 급제하여 사필(史筆)을 잡았으나 이름과 지위는 크지 않았으니, 공의 고(考)이다. 재취(再娶)는 내금위 이성춘(李成春)의 따님인데 휘 시각(時覺), 시민(時敏), 시신(時慎), 시진(時進), 시민(時敏)을 낳았다. 학생(學生) 서응문(徐應文)의 따님에게도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었다. 진주 판관(晉州判官)으로 있을 때 해구를 만나 전투를 벌여 크게 이겨, 병마절도사에 자급을 올려 제수되었다. 또 적과 큰 전투를 벌여 세 번 패하자 직접 성(城)을 순찰하다가 마침내 날아온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전공(戰功)을 인정받아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니 공의 양고(養考)이다.
고(考)의 배필은 상의원(尙衣院) 직장(直長) 양언개(楊彦漑)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정축년(선조 10, 1577년) 7월 7일 공을 낳았다. 공은 자라면서 체격이 다부지고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정유년(선조 30, 1597년) 알성과(謁聖科)에 급제해 승문원 정자(正字)가 되었다. 기해년(선조 32, 1599년)에 춘방(春坊) 설서(設書)에서 사서(司書)로 승전하였으며, 병조 좌랑, 홍문관 수찬사, 헌부 지평을 거쳐 해미 읍재(海美邑宰)로 나가 은덕(恩德)과 위엄을 아울러 베풀어 이속(吏屬)은 단속되고 백성들은 삼가게 되었다. 무신년(선조 41, 1608년)에 다시 옥당(玉堂)과 미원(薇垣)으로 들어갔으며 이조 좌랑으로 전임되었다가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기유년(광해군 1, 1609년)에 제주 판관(濟州判官)에 제수되었는데 --몇 자 해독 불능--
곧 회복되어 성균관 사예(司藝)와 종부시(宗簿寺), 사복시(司僕寺) 정(正)을 역임했다. 계축년(광해군 5, 1613년)에 영남 균전사 정전역(嶺南均田使正田役)이 되었으며, 조정에 들어가 병조 참지(兵曹參知), 사간원 대사간(大司諫), 이조 참의를 하였다.
을묘년(광해군 7, 1615년)에 양대부인(養大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무오년(광해군 10, 1618년)에 병조와 형조, 공조의 참의(參議)와 승지(承旨)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를 당하여 광해(光海)의 정치가 어지럽고 인륜이 바로서지를 못하여 대비를 폐위하자는 의론이 제기되었다. 공이 한탄하여 큰소리로 말하기를 “지금이 어떠한 때인가.” 하고는 드디어 용호(龍湖)에 머물며 성 안으로 발을 들여놓지 않은 것이 여러 해였다.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스스로 즐기며 지냈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동래(東萊)는 왜(倭)와 접한 중요한 지역이라 하여 공을 부사로 임명하였으니, 재주와 국량이 뛰어나서일 뿐만이 아니라 폐비론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공은 백성을 보기를 마치 다친 사람을 보듯이 하여 여러 폐단을 없애 주었는데 백성들은 구리로 비석을 만들어 세워 주었다. 왜(倭)에게 연향(宴餉)의 음식을 대접할 때 정결하게 하였고, 세폐(歲幣)를 바칠 때에도 그 마땅함을 얻어, 왜(倭) 역시 공의 덕에 감복하여 보검과 진기한 기물(器物)을 보내왔다.
을축년(인조 3, 1625년)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묵은 병이 재발하여 5월 27일 객사(客舍)에서 졸하였으니, 향년이 49세이다. 청안현(淸安縣) 남쪽 율치(栗峙)에 장사 지냈다. 정유년(1657, 효종 8)에 부인이 병으로 세상을 떠 공의 묘 왼쪽에 장사 지냈다.
공은 기국(器局)과 도량(度量)이 깊었으며 기쁨과 성냄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고 굉략(宏略)이 출중하였다. 일송(一松) 심희수(沈喜壽) 상공(相公)은 공을 도수(都帥)를 맡을 만한 인물이라 하여 천거하였는데, 시대의 의론을 따른 것이었다.
부인은 이조 참의 목첨(睦詹)의 따님인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득신(得臣)이다. 문과(文科) 장령(掌令)이다. 장령 김성발(金聲發)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딸 다섯을 낳았다. 장남 천주(天柱)는 학생(學生) 유성하(柳成厦)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둘째는 딸인데 문과 현감(縣監) 최연(崔演)에게 시집가서 2남 2녀를 낳았다. 셋째 천정(天挺)은 진사 이계도(李繼道)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두었다. 넷째는 딸인데 현감 이중휘(李重輝)에게 시집가서 아들 하나를 두었다. 다섯째 천규(天揆)는 유학(幼學) 이승연(李承淵)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3남 1녀를 낳았다.
작은집에서 나온 첫째 아들은 득령(得岺)인데 사마(司馬)이며, 둘째 아들은 득성(得成)이며, 셋째 아들은 득평(得平)이다.
아아, 지극한 정에는 글이 이루어질 수 없으니, 다만 서(序)할 뿐이다.
열세(列世)의 방계 자손들이 사실을 기록해 두지 않으면 후인들이 어찌 보겠는가.
아들 통훈대부 행 장악원 정 겸 지제교 득신(得臣) 짓다.
손서(孫壻) 통정대부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 최연(崔演) 쓰다.
숭정(崇禎) 기원 47년 갑인년(현종 15, 1674년) 9월 일 세우다. [한국금석문종합영상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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