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증평읍 송산리 배극렴묘소(曾坪邑 松山里 裵克廉墓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증평읍 송산리 배극렴묘소(曾坪邑 松山里 裵克廉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4. 6. 1. 06:46

 송산리는 1914년에 송치리와 안자산리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송산리는 증평읍사무소에서 증평대교를 건너 두타산 안쪽에 있는 마을로, 두타산을 사이에 두고 진천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34번국도가 관통하는 이곳은 현재 대한주택공사의 송산지구택지개발사업으로 많은 변화가 있다.

 

 

배극렴의 묘소는 두타산 법천사팻말을 보고 진입하면 된다. 

묘소가 있는 동리의 지명은 삽사리/사곡(沙谷)은  서북쪽으로 두타산 밑에 있는 마을이다. 『호구총서』(정조 13년, 1789년)에는 삽사리를 ‘사읍사리(沙邑沙理)’로 적고 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사곡(沙谷)’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沙谷里/삽사리’로 나타난다. ‘삽사리’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본래 이름인 ‘사읍사리’에서 변한 것이라면, ‘모래가 많은 마을’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은 달리 부르는 ‘사곡’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곤충에도 ‘삽사리’가 있다. ‘삽사리’는 메뚜기목 메뚜깃과의 곤충으로, 몸길이 20~30mm이다. 몸빛은 누르스름하고 가늘고 길다. 머리꼭대기는 세모졌으며, 앞쪽으로 돌출되었으나 말단은 뾰족하지 않다. 수컷은 앞날개가 짧고 끝이 뭉툭하나, 암컷은 꼬리 끝에까지 달한다. 여름에 풀밭에서 운다. 만일 곤충과 관련 있다면, ‘삽사리가 많은 마을’로 풀이된다. 이 마을은 달리 ‘사곡’으로도 불리는데, 장마가 지면 두타산에서 모래가 많이 내려와 쌓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동네로 진입하여 오르다 보면 자칫 배극렴의 묘소를 지나 법화사까지 오를수 있다.마을로 진입하여 오르다 첫번째 우측골목으로 오르면 좌측 야트막한 언덕에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배극렴의 묘소 진입골목에 작은 팻말이라도 하나 세워 놓는다면 초행길에 겪는 낭패를 반감시킬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의 묘소는 송산리 두타산 대야봉 아래에 있다. 배극렴의 묘소는 장방형(長方形)으로 가로 3.47mㆍ세로 4.37mㆍ높이 1.70m이고, 상석은 가로 1.20mㆍ세로 0.84mㆍ높이 0.195m이다. 묘소에는 호석(護石)이 둘러 있고, 앞에는 장명등(長明燈)ㆍ문관석(文官石)ㆍ양석(羊石)ㆍ향로석(香爐石)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묘소 20m 아래에는 고종 25년(1888)에 대사헌 박성양(朴性陽)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으며, 묘소 앞 100m쯤에는 배극렴의 사당인 경절재(景節齊)가 있다. 증평향토문화연구회의 조사ㆍ연구 활동을 통해 문화재의 귀중함을 인식시키고, 보존 관리가 필요함을 각계에 홍보해 1994년 12월 30일에 충청북도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었다.그러나 2002년경 배극렴묘소앞에 석물을 도난당하였다.그 후 장명석등을 후보하였다.

 

 

 

 

배극렴(裵克廉: 1325~1392)은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자는 양가(量可)ㆍ호는 필암(筆菴)ㆍ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위위[의장(儀裝)을 맡은 관아] 소윤(小尹: 종4품) 배형보(裵賢輔)와 성주이씨(星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해 진주목사(晋州牧使)ㆍ윤주목사(尹州牧使)ㆍ계림부윤(鷄林府尹)ㆍ화령부윤(和寧府尹: 종2품)ㆍ합포진첨사(合浦鎭僉使: 종3품) 등을 역임했고, 우왕 2년(1376)과 우왕 4년(1378) 왜구 격파에 공을 세웠다. 이성계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고 우왕 14년(1388)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위화도회군을 결행했다.

 

 

 

 

고려 말년 백성들 가운데에는 “비의군자(非衣君子)의 지혜로 삼한(三韓)을 바로 잡는다.”라는 말이 떠돌았다. 이는 ‘비(非)’와 ‘의(衣)’를 합치면 ‘배(裵)’자인 바, 배극렴이 고려 말 기우는 국운 속에서 백성들에게 얼마나 추앙받았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1392년에 이성계를 추대해 개국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어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해지고,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후에 좌의정)에 이르렀다. 태조 이성계가 세자책봉을 의논할 때에 “시국이 평온할 때는 적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공을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라고 주장했다가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로 귀양을 갔다.

 

 

배극렴은 1392년 9월 8일에 68세로 세상을 떴는데, 그가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진주목사로 부임해 잣나무를 관아 북쪽에 심어놓고 왕에게 청렴과 검소로 백성을 돌볼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 후 중앙관서의 시중(侍中)이 되자 진주 사람들이 그 나무를 ‘시중백(侍中栢)’이라 명명했다. 해마다 송산리에서 4월 5일에 한식제사를 지내고, 출생지인 경북 성주군 성주읍 대황동 사당에서는 음력 9월 7일 제사를 지낸다.

 

 

그가 고려 공민왕 12년(1363)에 진주목사로 부임해 잣나무를 관아 북쪽에 심어놓고 왕에게 청렴과 검소로 백성을 돌볼 것을 약속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지 48년 뒤인 1440년(조선 세종22)에 그가 심어 놓은 푸른 잣나무를 보고 당시 진주목사인 정이오(鄭以五)는

다음과 같은 ‘시중백시(侍中栢詩)'를 지었다고 전한다.

 

시중백시(侍中栢詩)

세속의 상태를 싫도록 보아오기 반백년에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는 재목으로

백성을 구제한 당신이 관아에 손수 심은 뜻 알겠구나

솔솔부는 맑은 바람 머물러 두었다가 후세에 전하리라.

 

 

 

 

 

괴산군 불정면에 위치하는 어래산(御來山)에는 고려말 조선 초의 무신인 배극렴(裵克廉)과 이성계(李成桂)에 관한 설화가 전해온다. 고려 공민왕으로부터 총애를 받던 배극렴은 왕의 시역 사건이 일어나자 정사에 뜻을 버리고 부인과 함께 충주 고을로 낙향하였다. 배극렴은 어래산 동굴로 찾아 들어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기로 다짐하고 머루, 다래 등을 따먹으며 살았다. 그런데 당시 좌우군도총사였던 이성계가 왕실을 한 손에 휘어잡게 되고, 자신의 정권을 위한 명분으로 고려 중신이었던 우현보(禹玄寶),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배극렴(裵克廉)과 같은 사람들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고집하자 우현보와 이색은 하옥하였고, 정몽주는 격살하였다. 이성계는 배극렴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팔도 수령 방백에게 찾아내도록 명령을 내렸다. 우연히 배극렴이 충주 고을에서 은거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직접 배극렴을 찾아갔으나 첫 번째도 만나지 못하고 두 번째도 만나지 못하고 세 번째 가서야 동굴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배극렴을 만날 수 있었다. 배극렴을 만난 이성계는 앞으로의 집권 계획을 밝히고 협조해 줄 것을 간청하였고, 이를 들은 배극렴은 다시 정사에 나서서 개국공신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그 후 사람들은 이성계가 친히 세 번씩이나 이곳을 찾아 왔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삼방리’라 하고, 그 산의 이름을 ‘어래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극렴이 나무를 하던 골짜기를 ‘배나무골’이라고 부르고, 이성계가 배극렴을 만나 국사를 의논했던 곳을 ‘국사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2권, 1년(1392 임신 / 명 홍무(洪武) 25년) 11월 26일(계묘) 1번째기사문하 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의 졸기

문하 좌시중(門下左侍中) 성산백(星山伯) 배극렴이 졸(卒)하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 350) 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예장(禮葬)하게 하였다. 극렴(克廉)의 본관(本貫)은 경산(京山) 351) 이니, 위위 소윤(衛尉少尹) 배현보(裵玄甫)의 아들이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근신하며, 몸가짐은 근실하고 검소하였다. 진주(晉州)·상주(尙州) 두 주(州)의 목사(牧使)가 되고, 또 계림 윤(鷄林尹) 352) ·화령 윤(和寧尹)이 되어 모두 어진 정치를 하였다. 나가서 합포(合浦) 원수(元帥)가 되어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서 유망(流亡)한 사람들을 안집(安集)하였었다. 수비(守備)하는 것은 잘했으나 다만 싸워서 이기거나 공격하여 취하는 것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이르러 임금에게 마음을 돌려 조준 등과 더불어 서로 모의하여 임금을 추대하고는, 마침내 수상(首相)이 되었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하여 학술이 없어서 임금에게 의견을 아뢴 것이 없었으며,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 이르러서도 이에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어린 서자를 세울 것을 청하고는 스스로 공(功)으로 삼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탄식하였다. 졸(卒)하니 나이 68세였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아들이 없었다.

 

[註 350]소선(素膳) : 어육(魚肉)을 쓰지 아니한 반찬.

[註 351] 경산(京山) : 성산(星山).[註 352]계림 윤(鷄林尹) : 경주 윤(慶州尹

 

위의 내용중에서 그러나 배우지 못하여 학술이 없어서 임금에게 의견을 아뢴 것이 없었으며

라는 대목을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아마 이방원이 자신의 세자추대에 동조하지 않았던 배극렴에게 일종의 미움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실록이 쓰여진 시대가 태종때에 시기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