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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면 후곡리 이강영당(文義面 後谷里 理江影堂)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문의면 후곡리 이강영당(文義面 後谷里 理江影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3. 14. 13:54

 

문의면 후곡리 이강영당을 찾는길은 한적하다.인적이 없는 차 한대 겨우 통과할수 있는 길을 가노라면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느낌이 든다. 교통상황과 도로사정이 그리 좋치않으니 하루에 몇번 없는 후곡리 시내버스라도 중간에 만난다면 차량을 뒤로 후진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것 같다. 바람만이 반기는 곳 인적이 없는 후곡리는 그렇게 나의 가슴에 다가왔다. 

 

 

 

멀리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야산밑에 이강영당이 자리하고있다.

 

이강영당은 1930년에 이광정(, 1552~1627)과 이만원()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세운 영당으로 1980년 대청댐 공사로 인해 후곡마을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이광정()의 영정은 관복을 입은 전신교의좌상()으로 가로 99㎝, 세로 164㎝의 설채견본()이다. 뒷면에 적힌 화상기를 통해 1609년(광해군 1) 명나라에 갔을 때 원승광()이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만원()의 영정은 역시 관복을 입은 전신교의좌상으로 가로 85㎝, 세로 166㎝의 설채견본이다. 1729년(정조 16) 매선당()이 개모한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영당은 1980년 이전 복원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대청에 분합문을 달고 좌우에 3칸의 온돌방과 1칸 반의 부엌을 앞으로 배치한 홑처마의 다자 목조기와집이다. 마당 앞에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이광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 자는 덕휘(), 호는 해고()이다. 정언을 지낸 이주()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0년(선조 23) 교관()으로 있으면서 증광문과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정자·사관·시강원설서를 역임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이후 정언()·예조좌랑()·병조좌랑·동부숭지·이조참의·예조참의·병조참의·좌승지 등 정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고 대사성이 되었다.

1597년에는 명나라 사신 심유경
()의 접반사가 되어 일본과의 회담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였고, 1598년에는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에 내려가 왜군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듬해 호조판서·공조판서·한성부윤을 지냈고, 1601년에는 지중추부사로 청백리에 선발되었다.

1602년 대사헌 때 인목대비의 책봉에 대한 고명을 받기 위해 주청사(使)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1604년 호성공신() 2등으로 연원군()에 봉해졌고, 이어 보국숭록대부(祿)에 올라 부원군()에 진봉()되었다. 1626년(인조 4) 개성부유수()가 되었으나 이듬해 정묘호란 때 강화()에 들어가 병사했다.

 

 

 

 

 

이만원(李萬元)은 본관은 연안()이며 자는 백춘(), 호는 이우당()이다. 아버지는 이형()이다.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 정언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에 지평이 되어 송시열(), 윤증()의 시비를 분별할 것을 상소하자 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홍문록()에도 올랐다.

이후 정언, 지평, 부교리, 헌납, 이조좌랑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곧 승지에 발탁되었다가 광주부윤을 거쳤으며, 1690년에 이조참의가 되어 진휼을 위한 공명첩의 남발에 따른 폐단을 상소하였다. 그 뒤 대사간, 이조참의를 거쳐 1693년 평안도관찰사가 되었고 2년 후에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

1697년 성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칭송하였다. 1700년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공조참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연릉군()에 봉해지고, 1796년(정조 20) 청백리에 뽑혔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에 있으며, 후곡리의 이강영당(
)과 충청남도 공주시의 부용당() 영당()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