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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척면 송강리 손순효묘소(山尺面 松江里 孫舜孝墓所)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산척면 송강리 손순효묘소(山尺面 松江里 孫舜孝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7. 5. 08:44

 

산척면 송강리 행정마을에 있는 조선조 문신이였던 손순효의 묘지이다.묘지에는 구.신비석과 문인석2점과 장명등 1점이 있으며 묘소는 호석을 두르고 있다.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경보(敬甫), 호는 물재(勿齋)·칠휴거사(七休居士). 영(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례(有禮)이고, 아버지는 군수 밀(密)이다.어머니는 정선군사(旌善郡事) 조온보(趙溫寶)의 딸이다.

1451년(문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453년(단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또, 1457년(세조 3)에는 감찰로 문과중시에 정과로 각각 급제하였다. 이어 경창부승에 발탁되고, 병조좌랑·형조정랑·집의·전한 등을 역임하였다.

1471년(성종 2) 17조의 시무책을 올려 채택되어 형조참의에 특진되었으나 직무상 과오가 있다 하여 상호군으로 전임되었다. 그 뒤 장례원판결사가 되어 소송 문제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였다. 1475년 부제학을 거쳐 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를 지내고, 1478년 도승지가 되었다.

이어 강원도관찰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호조참판·형조참판을 지내면서 왕비 윤씨의 폐위를 반대하였다. 1480년 지중추부사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공조판서·경기도관찰사·대사헌·한성부판윤·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485년임사홍(任士洪)을 두둔하다가 왕의 비위에 거슬려 경상도관찰사로 나아가 연해안 방어책을 강구하였다. 이어 우찬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지냈으며, 고령으로 사퇴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중용』·『대학』·『역경』 등에 정통하였다. 문장이 뛰어나고 대나무 그림에 능하였다.『세조실록』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손순효 묘지앞에 석인들입니다

손순효와 성종임금의 일화가 있다.손순효는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그러나 손순효는 술을 참 좋아했다.거의 매일 술에 취하여 있으니 성종은 그에게 술을 줄이고 많이 마시지 말것을 이야기 하며 작은 잔을 손순효에게 하사하며 그 잔으로 하루에 세잔 이상 마시지 말라고 이야기를 했다.그 정도의 양이면 술에 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성종의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느때와 같이 손순효가 술에 취하여 있는 것을 보고 어찌 임금의 명을 어기느냐 하며 그 연유를 물으니 손순효가 답하길"저는 임금님의 명을 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며 이야기를 하니 작은 술잔으로 술을 마시니 그 양이 차지를 않는바 공인에게 작은 잔을 두드려 잔의 두께는 얇아져도 잔의 크기를 크게 만드니 그제서야 자신이 원하는 술의 양을 마실수 있었던 것이다.그 이야기를 들은 성종임금은 허허 웃으며 손순효에게 술을 마실수 있도록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생전의 술을 좋아한 손순효의 무덤에 두른 호석에는 술병이 새겨져 있으니 그의 애주의 마음을 알수 있을것 같다.

   

 

장명등입니다.

'임금은 그 재주를 사랑하여 매우 소중히 여겼다. 매양 그가 술 마시기 좋아함을 경계하여, "석 잔에서 더 마시지 말라" 하니 공은 "삼가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연려실기술> 손순효가 어찌어찌 하다 또 과음을 한 모양이다. 그러나 한번의 질책이 있은 후 그 끝은 인간적인 술친구(?)의 모습으로 끝났다.'임금은 궁인에게 명하여 비파를 타며 노래를 부르게 하고, 또 공에게 명하여 일어나 춤추게 하니 공은 이내 취하여 쓰러졌다. 임금이 남색 비단 철릭(帖裏)을 벗어서 덮어 주니…'.-<연려실기술>그의 유언은 애주가답게 '좋은 소주 한 병을 무덤 앞에 묻어 달라"(연려실기술)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고장 충주와 인연을 맺고 있다. 그의 묘와 신도비가 천등산 기슭인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에 행정마을에 위치한다.

 

구비와 신비가 나란히 어깨동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