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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면 신만리 양여공묘소(嚴政面 新萬里 梁汝恭墓所)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엄정면 신만리 양여공묘소(嚴政面 新萬里 梁汝恭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7. 27. 09:57

 

양여공은 1378(우왕 4)∼1433(세종 13).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양여공의 묘소는 충주시 엄정면 신만리 (웃세고개)마을 입구 야산에 자리하고 있다.

 

 

 

 

 

신만리 (웃세고개)간판을 보며 진입하면 20여미터앞에 좌측으로 야산이 있다.

야산 앞에는 축사로 사용하던 건물이 퇴락된체 덤불속에 방치되여 있다. 야산입구에 산을 향해있는 작은 오솔길이 눈에 띤다.

양여공의 묘소는 이 오솔길을 따라 2~3분이면 도착할수 있다. 밑에 사진에서 전봇대뒤로 보이는 야산이다.

 


 

묘역은 약 20평 정도이며 상석과 문인석이 있으나 오래되어 풍화가 심하다. 봉분은 높이 180㎝, 밑변 길이가 620㎝이며 낮게 주저앉은 상태이다. 묘표석은 대리석으로 심하게 풍화되어 글자를 판독하기 어렵다. 봉분의 우측에 묘비가 있는데, 1435년(세종 17) 대제학 윤회가 글을 쓴 묘비가 있었으나 중간에 없어진 것을, 1877년 후손들이 다시 만들어 세웠다.

묘비에는 타계한 해가 1433년(세종 15)으로 되어 있다.

 

 

 

 

양여공의 본관은 충주(). 자는 경지(), 호는 유정(). 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환()이고, 아버지는 숙()이며, 어머니는 윤정신()의 딸이다. 1405년(태종 5)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에 올랐다. 문장에 능통하여 중시() 때 이조정랑 김자()가 그의 시권()을 빼앗아 이름을 고쳐 써서 바치니, 장원급제하였다고 한다.

1418년(세종 즉위년) 병조정랑으로 재직중, 병사()를 상왕인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판서 박습() 등과 함께 장형()을 받고 함안에 유배되었다.

1431년 충주에 있던 중 기생 예성화()를 빼앗아, 원한을 품은 유연생()의 위조고발에 의하여 반역을 음모하였다는 죄로 사형당하였다.

양여공 [梁汝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후에 생전의 지극한 효행으로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효행을 찬양하기 위하여 건립된 양여공 효자각()이 있다. 양여공 효자각은 1748년(영조 24)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에 세워졌는데, 양여공의 후손들이 이주하면서 1808년(순조 8) 살미면 문강리에 중건하였다.

서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양여공 효자각은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구획하여 전면에만 홍전()을 세우고 편액을 걸었다. 구조는 자연석으로 1단 축조한 기단상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원형주()를 세웠는데, 공포와 창방을 생략하고 있는, 간결한 납도리 삼량 집으로 홑처마 팔작 지붕을 이루고 있다

 

 

 


[충주시 살미면 문강리 문산마을에 자리한 양여공의 정려문이다.]

 

 

 

양여공의 이야기를 하다보면 기녀 예성화의 이야기를 빼놓을수 없다. 조선시대 기녀들은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에서 '해어화'(解語花)라고도 불렀다. 이런 기녀들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번 기적(妓籍)에 올려지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기생과 양반 사이에 태어난 경우라도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됐다. 이때의 천자는 노비, 수모법은 '어머니 신분을 따른다'는 뜻을 지닌다.  
기녀들에게도 병이 찾아왔고, 또 나이가 들면 제구실을 할 수 없었다. 이럴 때 기녀직을 조금이라도 일찍 퇴직하고 싶으면 자신의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입적시켜야 했다. 이를 '대비정속'(代婢定屬)이라고 불렀다. 


 

양여공의 인생 궤적에 기녀가 등장한다. 바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예성화(芮城花)이다. 실록은 두 사람의 처음 만남 과정까지를 상세히 기술해 놓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양여공이 유연생(柳衍生)이라는 인물의 연인이었던 예성화를 가로챈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유연생이 조정에 거짓 고변을 하는 글이다. 

"양여공 및 제천·음성·괴산 등 수령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임금을 향하여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지꺼리면서 반역을 음모하여, (…) 이달 5월 20일에 서울로 향하려고 한다."-<세종실록>
기녀 예성화로 인해서  양여공은 역모죄로, 유연생 역시 그후 거짓이 탄로나 참형을 당했다. 두남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예성화의 미모가 어땠을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도 해본다.예성화에 대하여 검색을 해보니 세종실록에 등장하는 기녀이다. 김보중이라는 자가 유연생의 기녀인 예성화를 빼앗고는 도리어 이를 꺼리는 마음에서 도절제사에게 유연생의 과실을 고소하는 등 유연생에게 불리한 일을 꾸미자 유연생이 원망을 품고 거짓 반역을 모의했다고 하였다. 의금부는 이 일을 들어 유연생을 불대시참형에 처하였다.

 

 

 

 

양여공에 대한 또하나의 이야기는 충주목사 전목(全穆)이라는 인물이 금란(金蘭)이라는 기녀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들의 사랑이 길지는 않았다. 전목은 인사로 인해 충주를 떠야야 했다. 다음의 시로 추정컨데 이때 두 사람 사이에 "경솔히 남에게 몸을 허락하지 말라", "월악산이 무너져도 변치 않겠다"와 같은 언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떠난 후 금란이 단월역 역승과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가 전목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전목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보냈다. 용재총화 등 여러 고문헌에 등장하는 것으로 봐 꾸며낸 얘기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들으니 네가 문득 단월역승 사랑하여(聞汝便憐斷月丞) / 깊은 밤에 역을 향해 분주하게 다닌다지(夜深常向驛奔騰) /

 어느 때 무서운 매 손에 잡고 달려가서(何時手執三稜杖) / 월악산 무너짐 두고 맹세한 말 따지겠다.'(歸問心期月嶽崩).-<용재총화>

 

그러자 금란은 다음과 같은 시로 화답한다.
'북쪽에 전군이 있고 남쪽에는 승이 있으니(北有全君南有丞) / 첩의 마음 정할 수 없어 뜬구름 같도다(妾心無定似雲騰) /

 만약 맹세한 바와 같이 산이 변할진대(若將盟誓山如變) / 월악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무너졌는고.'(月嶽于今幾度崩)-<용재총화> 

기녀에게서 무슨 절개를 기대하느냐는 투의 핀잔과 야유가 엿보이고 있다. 조선시대 때 기녀들은 양반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그러나 이 시의 진짜 저자는 금란이 아닌 양여공(梁汝恭·1378~1431)이라는 인물이다.  

용재총화는 두 시를 소개한 산문의 후미를 '이것은 모두 사문(斯文) 양여공이 지은 것이었다'라고 쓰고 있다. 이때의 '사문'은 유학자를 일컫는다.

그렇다면 금란은 이때 또 다른 남자 양여공을 만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양여공은 시와 글에 능하였다고 전하는데, 성종 대에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에 「촌장에 앓고 누워 유치양에게[ ]」, 「즉사 정 박 부정[]」, 「차운()」, 「이이립()의 부친 시에 차운하여[]」, 「무극계상별이립 이립유시 차운증지( )」 등이 남아 있다.   [梁汝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卽事呈朴副正               자리에서 박부정에게 주노라

 

 

      梁汝恭                        양여공

可與言人少                    함께 말할 사람은 적고
不如意事多                    생각이 다른 일은 많다
古賢猶若此                    옛 성현들도 오히려 이런데
今我亦云何                    지금의 나야 말해 뭣하리

 

欲語還緘默                    말하고자 하다가 도로 입다물고
將歌忽嘆嗟                    노래하려다가 도로 탄식한다
眼前千萬計                    눈앞의 천만가지 계책 중에
爭似醉吟哦                    취해 떠벌리는 것보다 뭐가 낫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