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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면 신만리 양능길묘소(嚴政面 新萬里 梁能吉墓所)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엄정면 신만리 양능길묘소(嚴政面 新萬里 梁能吉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7. 28. 09:56

 

양능길의 묘소는 양여공의 묘에서 산 윗쪽으로 100여미터 위에 자리하고 있다.

양능길의 묘소를 찾은때는 녹음이 우거지고 비는 내리고 묘소에 잡풀은 무성하고하여 묘소를 잘 살펴볼수가 없었다. 


 

양능길은 고려 전기 예성군에 봉해졌던 충주양씨 시조이다.

본관 충주()이며  탐라국왕 양을나()의 후손으로 충주양씨의 시조이다.

양능길()은 고려가 건국되고 후삼국이 통일될 때 공을 세워 삼중삼한대장군에 오르고 예성군에 봉해졌다. 본래 양능길은 제주양씨였으나 예성(중원소경의 별칭)을 식읍으로 하사받으면서 후손들이 양능길을 시조로 하고 940년(태조 23) 중원소경이 충주로 개칭되면서 충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양능길은 타고난 품성이 영민하고 비범했으며, 육체적인 힘도 뛰어나서 무장으로서 자질이 뛰어났다고 전한다.

 

묘비의 비제는 ‘고려대장군예성군양공능길묘비갈()’이다.

 


묘소는 형태가 팔각형의 죽절형(竹節形) 모서리 기둥을 새긴 호석(護石)을 두른 특이한 양식이다. 일부 풍화되고 결실된 부분을 보수한 흔적이 있으나, 고려시대 분묘 유적으로 그 유례가 희귀하다.

묘소앞에는 양능길의 묘갈이 있다 묘갈은 후손들에 의하여 1977년에 세워졌다.






 

 


충주양씨는 양능길()을 시조로 한다. 양능길은 본래 제주양씨였으나 고려 개국에 공이 있어 예성군에 봉해졌고, 이후 후손들이 양능길을 시조로 하고 충주(옛 이름 예성)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봉작은 출신 지역이나 거주 지역과 연관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시조 양능길이 예성군에 봉해졌다는 점에서 양능길의 선대부터 충주에 세거하고 있었거나 양능길 대에서부터 거주했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시기를 알기는 어렵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충주 세거 성씨로 기록되어 있고, 특히 1898년 편찬된 『충주군읍지()』에 충주양씨가 기록된 점으로 보아 충주양씨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충주에 세거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충주양씨의 세거지는 살미면 문강리에 자리하고 있다. 문강리에는 양능길의 후손인 양여공의 정려문이 자리하고있다.



 


 

엄정면 신만리에 자리한 양능길과 양여공의 묘인 충주 양씨(忠州梁氏) 묘역이 충북도 문화재 제153호로 지정관리 되고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걸쳐 조성된 충주 양씨 묘역은 1만8438㎡ 규모로, 양능길 묘소(32.7㎡)와 양여공 묘소(35.2㎡)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충주 양씨 종중에서 관리 중인 묘역 주변 종중 소유 임야도 보호구역으로 지정됐다.


 


 

양능길과 관련된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오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양능길의 묘역 건너편으로 신털봉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작은 산이 있다.

이 산이 신털봉이라는 이름을 가진데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진다.

 

양능길이 죽자 양능길의 장지를 찾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장지를 찾게되였다.

장례일에 많은 사람들이 찾게되니 그 행렬이 목계나루에서 장지까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런데 장례일에 비가 내려 진흙이 신발에 묻게되니 많은 사람들이 고역이였다.

그렇다고 예의상 장지에 흙을 털수가 없으니 맞은편 야산에 신발에 흙을 털었다.

조문객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신발털은 흙이 산봉우리를 이루었다고 하여 그 이름을 신털봉이라 하였다고 한다.

전해지는 이야기만 들어도 그 당시 양능길의 권세가 어느정도였는지 짐작이 가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