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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화성리 연병호송덕비(道安面 花城里 延秉昊頌德碑) 본문
도안면 화성리 도안초등학교 앞에 자리하고 있는 국회의원 연병호의 송덕비이다.
연병호의 이명은 도명·동학·병학·병준.
1910년의 한일합병 후에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19년에는 송세호(宋世浩)와 함께 귀국해 이병철(李秉澈)·조용주(趙鏞周)·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청년외교단을 조직했다. 청년외교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국내 단체 중에서 가장 먼저 창립된 단체로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로 보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대한독립애국부인회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독립운동참가단체조사표' 등을 작성·보고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출옥 후 상하이로 다시 건너간 그는 1922년 7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安昌浩)·조소앙(趙素昻)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해 수습책을 강구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의견이 갈라지자 조소앙·김용철(金容喆)·조완(趙完) 등과 함께 탈퇴했다.
1929년말 안창호·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조직했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尹琦燮)과 함께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김원식(金元植) 등과 회합하고 독립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해 양 단체를 통합해 신한독립당을 조직했다. 그뒤 임시 의정원 충청도 의원에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1937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징역 8년형을 받고 복역했다. 1945년 8·15해방 후 임시정부환국준비위원회 영접부장으로 활동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가까운 석곡리에 연병호 선생의 생가와 영정을 모신 명덕정사가 자리하고 있다.
송덕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3년 10월 연암저수지 몽리자일동이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내용은 노암리에 1952년 10월 2일 국고 이억팔천사백이십칠만일천삼백원으로 영수제를 착공하여 1957년6월30일 준공했다.
그로인해 도안면 지역 몽리면적 171정의 빈토지(빈토지)가 양딜의 토지로 변하게 되므로 농민의 소득이 증대하였기에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규모는 넒이 67,두께26,높이 210센티이다.
연병호(延秉昊, 1894~1963)는 증평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1937년 중국 상하이에서 일경에 체포되기까지 20여 년을 국내와 중국 관내, 만주 등지를 무대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발을 내딛으며,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신한독립당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형 연병환 역시 독립유공자이며, 형의 딸 연미당과 사위 엄항섭, 외손녀 엄기선 또한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공적으로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곧 연병호는 3대에 걸쳐 5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가문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연병호는 1894년 11월 22일 괴산군 도안면 석곡리(현재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에서 부친 연채우(延彩羽)와 전주 이씨 사이에서 4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곡산이고, 호는 원명(圓明)이다. 어린 시절 그의 가정 형편은 겨우 빈농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그의 선대가 도안면에 세거한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이다. 연정은 부친이 죽은 후 어머니 상산 김씨의 친정인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로 내려와 살게 되었고, 이 후 안동 김씨와 결혼하면서 처가인 도안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현재 곡산 연씨가 도안면 내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 여러 곳 있다.
[석곡리에 위치하고 있는 연병호 생가이다]
연병호는 형 병환(秉煥)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북간도 용정에서 중국 해관원으로 근무하던 병환은 용정에서 전개된 3·1운동을 지원했다가 일본영사관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병환은 세관에 근무했던 관계로 다른 사람의 몇 곱절되는 많은 봉급을 받았는데, 이를 독립운동에 지원하였던 것이다. 연병호는 고향 도안에서 중명학교(重明學校)를 마치고 형의 부름을 받아 1913년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중등과정의 창동학원(昌東學院)에 입학하여 수학하였으나, 이듬해에 병에 걸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연병호는 1916년 서울기독교청년회관 영어과에 입학하여 1년 정도 수학하였다. 이 또한 이미 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형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기독교청년회관에 재학하는 동안 안재홍·조용주 등과 교유하였는데, 이는 기독교를 배경으로 대한민국청년외교단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중요한 인적 기반이 되었다.
연병호가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을 결성하면서였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청년들이 주체가 되어 '독립정신의 보급 및 선전과 아울러 세계 각국에 외교원을 파견하여 독립 실현을 보장받는 것'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연병호는 조용주·송세호·안재홍·이병철 등과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조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외교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외교활동을 주요 방략으로 삼았던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국내 비밀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배달청년당으로의 개편을 추진해 갔다. 그러나 이 해 11월말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발각되면서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연병호는 궐석재판을 통하여 징역 3년을 선고 받았으나, 이미 해외로 망명한 뒤였기에 옥고를 치르지는 않았다. --> | |||||
한편 일제의 한 조사에 의하면, 연병호가 안도현 내두산(內頭山)을 근거로 약 40명의 부하를 거느린 광복단독립산포대(光復團獨立山砲隊)의 수장으로 되어 있다. 이 자료에는 그의 이름을 연병학(延秉學)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연령과 출신지가 일치함으로 동일인임이 분명하고, 그가 상하이로 가기 전에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
이후 연병호는 상하이로 가서 1922년 2월 제10회 임시의정원 회의에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 문제로 혼란하자 여러 번 사임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그 해 4월 십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모여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결성하였다. 세계한인동맹회는 당시 상하이 한인단체로서 결성 직후의 회원이 500여 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연병호는 세계한인동맹회에 참여하여 주무를 맡았으며, 그의 집(프랑스 조계 군영로 2호)을 통신소로 활용하였다. 또한 6월에 유호청년회(留滬靑年會)가 조직되었는데, 그는 윤자영·이규정 등과 9인 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그가 비교적 일찍이 상하이 독립운동 세력 중 인정받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해 7월, 연병호가 이끄는 세계한인동맹회를 비롯하여 각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였다. 시사책진회의 주요 안건은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를 포함하여 임시정부의 개편 방향과 임시의정원의 처리 여부 등이었다. 이때 그는 34명의 서명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시사책진회에서도 해결 방도를 찾기 어렵다고 판단한 그는 7월 28일 조소앙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 다시 베이징과 만주로 무대를 옮겨 --> | |||||
연병호는 베이징으로 거처를 옮겨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갔다. 이 무렵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 탄핵안을 가결하고, 2대 대통령으로 박은식을 선출하였다. 그러자 연병호는 1925년 5월, 이천민·박숭병과 함께 이승만 탄핵에 대한 부당함과 대통령 선출 방식을 지적하는 『교정서(矯正書)』를 발표하였다. 당시 그의 동지인 이천민(본명 이세영)은 의병 출신으로,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대한통의부 군사위원장을 지낸 독립군의 지도자였다. 박숭병은 임시정부 초기에 군무부 위원으로 활동한 인사였다.
[연병호선생의 영정을 모시며 제향하고 있는 명덕정사이다 위치는 생가옆에 자리하고 있다] | |||||
1933년 9월, 그는 충청도의원 자격으로 다시 임시의정원에 참여하였다. 1934년 1월 초에 열린 제26회 회의에서는 차리석·윤기섭·조소앙 등 기존 의원을 비롯하여, 최동오 등과 함께 선출되어 임시의정원을 운영해 나갔다. 이 무렵 그는 신한독립당을 통해 당시 전개되던 대당 조직운동에도 적극 참가했다. 대당 조직운동이란 독립운동 정당이 각기 분립하고 있던 것을 하나로 통합해 민족대당(民族大黨)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에 1935년 7월 신한독립당을 포함해 5개 정당과 단체가 통일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하기에 이르렀으나, 이념의 차이와 파벌이 형성되면서 통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7년 초 일제 밀정인 상해거류조선인회(上海居留朝鮮人會) 회장 이갑녕이 저격되는 일이 일어났다. 일제는 대대적으로 사건에 관련된 한인 체포에 나섰고, 그는 이 사건 연루자로 1937년 1월 7일 상하이에서 체포되었다. 일제는 그를 국내로 압송해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징역 6년형을 선고하였고, 그는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 고향 증평에 조성되는 '연병호항일역사공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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