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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면 주치리 독립유공자홍승로선생묘지(蘇台面 周峙里 獨立有攻者洪承魯先生墓地)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소태면 주치리 독립유공자홍승로선생묘지(蘇台面 周峙里 獨立有攻者洪承魯先生墓地)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0. 20. 11:18

 

소태면 주치리 외촌마을의 이정표를 보고 새로 포장된 고개를 넘으면 우측으로 팻말이 보인다.

큰길에서 소롯길을 따라 20여미터 가다보면 갈래길이 나오며 왼쪽길로 접어들어 이길을 지나 조금가다보면 좌측에 작은동산이 있다

홍승로 선생의 묘지는 그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홍승로선생(1895-1964)은 충북 중원(中原) 소태면 덕은리 사람이다. 일본 중앙대학에 재학중인 1920년에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동회를 재일고학생의 통합적 조직체로 발전시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다. 동년 4월에 영친왕(英親王) 이 은(李垠)과 일본의 이본궁녀(梨本宮女)와의 성혼이 있게되자 이들 회원들은 이를 조국독립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결혼식을 저지하는 한편 식장에 참석하기로 된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일인고관을 처단하고 또 일제기관을 폭파하여 한국독립의 기세를 올리고자 했다.



 따라서 이들은 거사에 앞서 폭탄을 제조하여 2차례에 걸쳐 폭탄의 성능을 시험해보면서 준비를 추진하였으나 사전에 이러한 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한편 동년 9월, 미의원단 일행이 동경에 체류할 때,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미의원단 일행이 숙소인 제국호텔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후 그는 동우회란 이름으로 30여명 규모의 순회연극단을 조직하고 1921년 6월에 귀국하여 전국각지를 돌면서 연극을 통한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홍승로는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을 담당하여 독립군을 도왔으며 8.15해뱡후 귀국하여 반민족행위자특별위원회 감찰위원으로 있으면서 많은 친일파들을 색출하였다.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국가보훈처 발췌]


註·조선민족운동년감 87면 ·고등경찰요사 197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15면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69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5권 229면 ·동아일보(1921. 6. 3, 6. 8, 6. 23, 6. 27)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0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20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95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053·1054·1447면 ·

동아일보(1920. 6. 6, 1921. 6. 3, 6. 8, 6. 23, 6. 27) 홍 원 표(洪元杓) 1909. 6. 2∼1939. 2. 7



일제강점기 시절 선생의 나라를 향한 구국의 마음은 타올랐을 텐데 지금 이곳 선생의 무덤에는 정적만이 흐른다.

그나마 홍승로선생의 발자취라도 볼수있게 해주는 입긴판만이 가을바람에 일렁인다.

깨끗히 단장되여 있는 묘지앞에 두손모아 선생의 나라향한 마음을 닮아보려 노력해 본다.




선생의 묘비에는 애국지사만당풍산홍공승로지묘(愛國志士晩堂豊山洪公承魯之墓)라고 음각되여 있다.

비석은 후손들에 의하여 1984년에 건립되였다. 비석의 후면에는 홍승로선생의 행적이 적혀있다.

선생에 묘지는 후손들에 의하여 깨끗히 관리되고 있다.[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