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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미면 세성리 유영길신도비(乷味面 洗星里 柳永吉神道碑) 본문
유영길(柳永吉)은 조선 중기 전주유씨 충주 입향조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순(德純), 호는 월봉(月蓬).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유세린(柳世麟)이며, 아버지는 참봉 유의(柳儀)이다. 어머니는 노첨(盧僉)의 딸이며, 동생은 유영경(柳永慶)이다. 유영길의 비석은 비석을 바라보며 좌측의 신도비이다.
기단 위에 거북 좌대를 얹고 그 위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를 얹은 형태의 신도비이다. 월봉신도비와 구봉신도비가 같은모양으로 나란히 서 있는데 좌측의 신도비가 월봉신도비이다. 비문에는“조선국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 행가선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전주유공신도비 명(朝鮮國贈資憲大夫?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
大提學世子左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嘉善大夫?曹?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全州?公神道碑銘)”이라 새겼다.
유영길(柳永吉)은 1559년(명종 14)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사간원정언을 거쳐 1562년(명종 17) 병조좌랑, 홍문관부수찬, 이듬해 사헌부지평, 사간원헌납, 성균관전적을 지내고, 1565년(명종 20)에 병조정랑에 이어 평안도도사가 되었으나 권신 이량(李樑)에 아부했다는 죄명으로 탄핵을 받아 이듬해 파직되었다.
1589년(선조 22)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승문원제조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방장 원호(元豪)가 여주에서 왜군의 도하를 막고 있을 때 격서(檄書)를 보내어 강원도로 소환하여 적의 도하를 가능케 한 실책을 범했다. 이듬해 도총관, 한성부우윤을 역임하고, 1594년(선조 27)에 진휼사가 되었으나 동인(東人)의 언관들에게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후 이이첨 등 대북 세력을 피하여 시골로 낙향할 뜻을 가지고 한강 상류 물길이 편리한 충주 목계로 왔으나, 목계는 당시 한강의 큰 포구로 장사꾼들의 근거지이므로 후손을 위하여 대소원면 완오리로 옮기고, 다시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로 이거하였다가
산수가 좋은 충주시 대소원면 팔봉리로 옮겨 정착하였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호군(護軍),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으며 이듬해 호조참판이 되었다. 1599년(선조 32)에 한성부좌윤, 예조참판, 경기도관찰사로 전임했다가 이듬해 다시 예조참판이 되고 1601년(선조 34)에 성천부사(成川府使)로 부임하다가 죽었다.
문집으로 『월봉집(月峰集)』이 있다. 묘소는 충주시 살미면 세성리에 있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유습을 시조로 하고 유영길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 세거 성씨이며 팔봉유씨라고도 칭한다.
전주유씨는 유습(柳濕)을 시조로 한다. 유습(柳濕)이 고려 말에 완산백에 추봉되면서 후손들이 유습(柳濕)을 시조로 하여 전주(옛 이름은 완산)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전주유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89명, 재상 1명, 공신 2명, 대제학 4명, 청백리 10명을 배출했다. 충주에 입향한 전주유씨의 대표적 인물은 강원감사를 지낸 유항(柳恒)이다.
이조참판을 역임한 유영길(柳永吉)이 광해군 때 이이첨 등 대북 세력을 피하여 현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로 낙향하면서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한강 상류에 위치해 물길이 편리한 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로 왔으나, 당시 목계가 상인들로 번잡한 포구였으므로 후손을 위하여 현 충주시 대소원면 완오리, 현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를 거쳐 다시 산수가 좋은 현 충주시 대소원면 문주리로 옮겨 정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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