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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미면 용천리 무릉사(乷味面 龍川里 武陵祠)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살미면 용천리 무릉사(乷味面 龍川里 武陵祠)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1. 4. 07:01

 

충주시 살미면 용천리에 있는 수암 권상하와 함월 최응성을 향사하고 있는 사당이다. 이칭으로 향현사(鄕賢祠)라고도 한다.

향현사라함은 몇몇 사림()들이 모여 세우는 소규모의 서원을 칭하는 명칭이다.


 

 

 

이 무릉사는 고종11년(갑술,1874)에 숙종때의 문장가인 최응성(崔應聖)의 후손들에 의하여 건립되어 1983년 충주댐 수몰로 인하여 무릉리로 이전

복원된 사당으로 수암 권상하와 함월 최응성을 향사하고 있다.

 


 

 

 

최응성의 생가인 최함월 고택 우측에 위치하고 있는 무릉사는 전면에 사분합띠살문을 달았고 자연석으로 축조한 기단에는 덤벙 주초석을 놓고

민흘림의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를 생략하였다.

가구느는 전방퇴주와 후방평주 사이에 내고주 대신 평고를 세워 대량을 결구하고 종량없이 체형대공을 대량 상부에 직접 놓아

종도리를 받치도록 한 4량 집으로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원래 살미면 무릉리에 있었던 것으로 1972년에 수해 이후 복구하지 않아 매우 퇴락해 있었는데 수몰선 안에 위치하기에 현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이전 복원하기 이전에는 서향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나 위패도 모셔져 있지 않은 채 우측협칸 선반에 제기 몇 개만이 얹혀있었다.

현재도 관리상태는 양호하지 못하다.


 

 

권상하는 1641년(인조 19)∼1721년(경종 1). 조선 후기의 학자.

 

서울 출신. 본관은 안동(). 자는 치도(), 호는 수암()·한수재(). 아버지는 집의격()이며, 동생은 우참찬상유()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정통 계승자이며, 인물성동이논쟁()인 호락논변()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660년(현종 1)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668년 스승 송시열이 좌의정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유임()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1659년(효종 10) 효종의 승하시에 있었던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다시 발생하여, 송시열은 관작을 박탈당하고 덕원()에 유배되는 불운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남인의 정권에서는 관계에 진출하는 것을 단념하고 청풍의 산중에 은거하며 학문과 교육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송시열은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 죄인이 유배지에서 달아나거나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되고, 이어서 사약()을 받게 되었다. 그는 유배지로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켰으며, 의복과 서적 등의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후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에 만동묘(萬東廟)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 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하였다.

1703년 찬선, 이듬해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그 밖에도 1705년이조참판과 찬선, 1712년판윤과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우의정·좌의정,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윤증()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권상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하여 훗날 ‘사문지적전()’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파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서 유계의 저술임을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윤휴()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다.”라고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하여 유규()를 비롯한 유생 8백여 명과 대사간이관명(李觀命), 수찬어유구(魚有龜) 등의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았다.

숙종 재위 중에 경신환국(1680)·기사환국(1689)·갑술환국(1694)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 사이에 당쟁이 치열했지만,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당쟁기에 살면서도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의 선유()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규명하려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과 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인성()과 물성()의 동이논쟁()인 호락논변이 제자 이간(李柬)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의 국()때문이며, 인리()가 곧 물리()인 것은 이()의 통()때문이다.’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에 동조하였다. 인성·물성 상이론의 발상은 후천적인 기질의 다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본성을 동물성으로부터 분별하고 보호하려는 데 있었다.

이처럼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하여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이이 이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준다. 또한 17세기 이후 성리학이 예학()에 의해 구체적인 사회 규범으로써 경직되어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 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현상벽(玄尙璧)·최징후()·성만징() 등의 강문팔학사()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기백이태연표()」·「형참권극화표()」·「부사과이숙표()」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한수재집』·『삼서집의(三書輯疑)』 등이 있다. 이 중 『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으로 영인되어 간행되었으며, 가전되던 영정을 수록하고 있다.

 

청풍의 황강서원()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순()이다. 권상하 [權尙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응성은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유생이다.

 

본관은 강릉(). 자는 인보(), 호는 함월(). 최문한()의 후손이고 형제로 형 최응건()이 있다.

 

1655년(효종 6) 충주에서 태어난 최응성()은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집 앞에 정자를 세웠는데 권상하가 정자의 운치를 칭찬하면서 함월정()이라고 명명했다. 스승이 지어 준 정자의 이름으로 호를 지었고 이후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다가 1727년(영조 3) 7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살미면 내사리 동막골에 있다.

 

1874년(고종 11) 최응성의 후손들이 무릉사를 지어 권상하와 최응성을 배향했다. 무릉사와 함월정은 충주시 살미면 용천리 428-1번지[중원대로 2250]에 있다. 함월정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7호이다.

 최응성 [崔應聖]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