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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원면 금곡리 김신국신도비(大召院面 金谷里 金藎國神道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대소원면 금곡리 김신국신도비(大召院面 金谷里 金藎國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1. 6. 14:26


금곡리는 과거 신라시대 때부터 전국적 규모의 철(鐵) 산지로 쇠실[金谷]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현재에도 위쇠실과 아랫쇠실이라는 마을이 있다.

금곡리라는 명칭은 1760년에 발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 나오며, 금곡리는 이안면에 속한 5개 방리 중 하나였다. 당시 금곡리에는 112가구에 540명(남 254, 여 286)이 살았다. 1898년에 나온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도 금곡리가 나오며, 1912년에도 그 명칭이 그대로 유지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곡리는 이류면[현 대소원면] 13개 리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금곡리는 대소원면에 속한 법정리로 상금곡과 하금곡 2개 행정리를 거느리게 되었다.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금곡리 아래쇠실마을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후추공(後瘳公) 김신국의 신도비이다.
조선 선조대와 인조대에 활동한 영중추부사 김신국의 신도비이다. 이 비는 1994년 11월에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음기되어 있다.
김신국의 유언에 의해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다가 1994년 방손 김상수(金象壽)가 찬(撰)하고 방손 김주흥(金周興)이 서(書)하였으며, 10대손 김진동(金鎭洞)이 전각(篆刻)하여 건립되었다.
국도 3호선을 따라가다 대소원면 대소원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2㎞ 정도 가면 철도 위의 고가를 넘어 아래쇠실마을이 나오고, 마을을 지나쳐 상금곡 마을비 50m 전방의 산자락에 김신국 신도비가 위용 있게 서 있다.





비좌대석의 형태로 규모가 크며 비신은 오석, 머릿돌과 대좌는 화강암으로 제작하였다. 머릿돌은 이수로 앞뒤로 네 마리의 용이 희롱하는 장면을 양각하였는데, 정교하지 못하다. 크기는 90×52.5×66㎝이다. 비신은 60.5×30×173㎝이고, 대좌는 2단으로 상단 81×51.5×7㎝, 하단 101×71×48㎝이며 무궁화가 양각되어 있다.

비의 앞면의 상단에는 전서체 5×9㎝의 크기로 ‘영중추부사후추공(領中樞府事後瘳公)’이라 쓰여 있고, 17×19㎝ 크기의 해서체로 ‘신도비(神道碑)’라 썼다. 오른쪽 면부터 음기를 하였는데, 비명은 4×4㎝의 크기의 해서체로 ‘청백리후추공휘신국비명(淸白吏後瘳公諱藎國碑銘)’이라 쓰고 본문은 1.5×2㎝ 크기로 음기하였다.

내용은 고조부부터 부모까지의 내력을 적고 평안도관찰사, 호조판서로 재직하며 활동한 것과 정묘호란 때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 갔던 일, 영중추부사로 승차한 이후 82세로 사망할 때까지의 일을 열거하였다. 이후 김신국의 정치관, 호연한 도량과 지혜로움에 대한 일화를 정리하여 기록하였다.



신도비를 건립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으나 주변에 잡초가 우거져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후손 김무영의 증언에 의하면 신도비명은 원문이 없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김신국(金藎國)은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에 은거했던 문신이다.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경진(景進). 호는 후추(後瘳). 김관(金灌)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김급(金汲)이다.


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급제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영남에서 의병 1,000여 명으로 거병하여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는 전공을 세워 참봉이 되었다.

1593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을 거쳐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춘추관사관으로 재직하면서 전란으로 소실된 일록(日錄)의 보충을 위해 사료의 수집을 청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군기선유관(軍機宣諭官)으로 엄정한 군공(軍功)을 논했으며, 사간원정언을 거쳐 1599년 어사로 관서 지방을 순무했다. 북인이 소북과 대북으로 갈라지자 소북의 영수가 되어 대북을 공격하다 파직되어 충주에 은거하였다.

1607년 복직되고 1613년(광해군 5) 임해군(臨海君)의 옥사에 공을 세워 익사공신에 오르고 청릉군에 봉해졌다. 이후 평안도관찰사, 우참찬,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623년 인조 즉위 후 파직되었다가 복권되어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다. 평안도관찰사 재임 중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해 성을 보수하고 군량 비축 등 전비(戰備)에 힘썼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연좌되어 국문까지 당했으나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호조판서로 이정구(李廷龜), 장유(張維)와 함께 청나라 사신과 화의(和議)를 약정했다. 이후 공조판서, 형조판서를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했다. 1637년 세자시강원이사로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를 따라서 심양에 갔다가 1640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고 1646년 영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충주에 은거하는 동안 선현의 언행과 사적을 기록한 『경현록(景賢錄)』을 편찬했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대소원면 금곡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