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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 기생 해월 열녀각(壽洞 妓生 海月 烈女閣)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수동 기생 해월 열녀각(壽洞 妓生 海月 烈女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1. 4. 08:28


청주시 상당구 수동에 있는 기생 해월의 정려각이다.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순절한 홍림(洪霖)[1685~1728]의 첩실이었던 기생 해월(海月)의 절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각이다.

 

해월의 정려각은 표충사 경내에 있다.표충사는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청주읍성으로 쳐들어갔을 때 반란군에 의해 죽은 충청병사 이봉상과 비장(裨將) 홍림, 영장(營將) 남연년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입니다. 충청병사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현손(玄孫)이다. 원래는 3충사라고 했다가, 1736년에 표충사로 사액받았다. 당시 영장이였던 남연년의 충신각은 원남면 하노리에 있다.

 


 

해월은 이인좌의 난 때 홍림이 희생되자 반란군에게 애원하여 그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냈다. 원래 홍림과 함께 죽을 마음이 있었으나 뱃속에 유복자가 있었기에 죽지 않았는데, 유복자가 7세가 되었을 때 요절하자 아들과 함께 죽었다.

1814년(순조 14) 목천 유생 민이혁(閔爾爀) 등이 상소하여 왕의 특명으로 정려되어 청주읍성 북문 안쪽에 있던 표충사의 동쪽에 정려문을 세웠는데, 1939년 표충사를 현재의 자리로 옮길 때 해월의 정려도 함께 옮겼다.

 

기생 해월과 관련있는 인물로는 홍림을 빼놓을수 없다

홍림(洪霖)은 조선 후기 이인좌(李麟佐)의 난(무신란) 때 충청병영의 무신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초명은 진(震), 자는 춘경(春卿)이다. 첨절제사 홍수명(洪受命)의 아들이다.


충청병마절도사 이봉상(李鳳祥)[1676~1728]에 의하여 청백함이 인정되어 1727년(영조 3) 막료가 되었다. 이인좌의 난으로 1728년 청주읍성이 함락되고 이봉상이 잡힌 다음 죽음을 당하자, 그는 자신이 절도사라하며 반란군을 꾸짖었다.

반란군은 그를 충신이라 칭찬하고 후일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겠다고 하자, “나는 아들도 없거니와 있다 하여도 너희 같은 역적 놈의 부하로 쓰이게 할 수는 없다.”하고 죽었다.

 

조현명(趙顯命)의 주청으로 1729년 6월 청주기(淸州妓)가 낳은 그의 아들이 면천(免賤)되고 7월에 예조의 계(啓)에 따라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정려되었다.

검토관 이성중(李成中)이 청주를 지나다가 그곳 사람들이 홍림의 충의에 대하여 칭찬하는 것을 듣고 1742년 왕에게 아뢰어 그의 처에게 늠료(廩料)가 하사되었으며,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특혜를 베풀어 그 충절을 기렸다. 표충사(表忠祠)에 배향되었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된 목조기와집으로 서향이다. 사면을 홍살로 막았고 정면에 작은 출입문을 달았는데 출입문 아래에는 섬돌이 놓여있다.

건물 정면 처마 아래에 “烈女閣(열녀각)”이라고 쓴 현판을 달았으며, 건물 안에는 편액이 걸려있다. 내부 좌측 벽면에는 홍림의 사적을 적은 편액이 걸려있는데 상태가 좋지 않다. 내부 바닥은 화강석으로 깔아 깨끗한 상태이다.

 

건물 안에 걸려 있는 편액에는 “烈女 贈參判 洪公 房妓 海月之閭 上之十四年甲戌命旌(열녀 증참판 홍공 방기 해월지려 상지십사년갑술명정: 열녀 참판에 추증된 홍공(홍림)의 房妓 해월의 열녀각이 1814년에 정려됨).”이라고 쓰여 있다.


정려가 표충사 경내에 있는 관계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기생 해월의 무덤은 우암산 우회도로의 대한불교수도원의 기점에서 우회도로를 따라 약 800m 지점이며, 우암산우회도로가 있어 접근하기에 편리하다.


태극문을 새긴 대리석에 ‘烈女海月之墓(열녀해월지묘)’라는 묘비와 더불어 있다


조선 영조(英祖) 즉위 후 소론이 배격되자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는 정희량(鄭希亮), 이유익(李有翼), 박필현(朴弼顯) 등과 공모하여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 청주성을 점령하였다.

반란군이 청주병영을 함락하자 이 때 그녀는 홍림이 좌영 부근에서 칼을 빼어 들고 이에 대항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어찌 70이 되신 어머니를 생각지도 않고 죽을 곳으로 가려 하십니까?”하자 홍림은 “당장 위기에 처해 있는 데 불효가 된다하여 어찌 의를 버리고 살겠는가?”하면서 이를 뿌리치고 나아가 싸우다가 절도사와 더불어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에 해월은 반란군에게 애걸하여 홍림의 시체를 찾아서 묻어 주었다.

그 뒤 유복자 홍유복(洪遺腹)을 낳아 7년 동안 키웠으나 요절하고 말았다. 해월은 “내가 남편이 죽던 날 같이 죽지 못한 것은 그의 유복자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젠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며 남편을 따라 죽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원남면 하노리에 있는 남연년의 충신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