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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면 구룡리 석성재(文義面 九龍里 石城齋)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문의면 구룡리 석성재(文義面 九龍里 石城齋)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6. 14. 13:24

 

문의면 구룡1리에 위치하고 있는 낙안오씨의 재실이다.

마을앞에 작은 연못이 자리하고 있어 밑으로 자리하고 있는 전답에 젖줄역할을 하고있다.

 

 

 

낙안오씨의 낙안(樂安)은 전라남도(全羅南道) 승주군(昇州郡)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는 백제시대의 분차군(分嵯郡 : 分 郡이라고도 한다)인데, 통일신라의 경덕왕 때 분령군(分嶺郡)으로 개명하였으며, 고려시대에 낙안군으로 개칭하여 나주(羅州)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에 현(縣)으로 강등되었다가 후에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조선시대에도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고 군으로 승격하기도 하였느데, 선조 때 군(郡)이 되었다가 1908년(융희 2)에 순천군(順天郡)과 보성군(寶城郡 두 군데 갈라서 편입되었다.
낙안오씨(樂安吳氏)의 시조(始祖) 오사룡(吳士龍)은 고려(高麗) 때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지내고 외적(外敵)을 토벌한 공으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고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後孫)들은 낙안(樂安)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8세손 척지(陟之)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경연관(經筵官)을 역임하여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가문의 인물을 살펴보면 척지(陟之)의 아들 백안(伯顔)이 세조(世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조 참조(吏曹參判)·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하였으며, 손자 원로(元老)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라 광주목(光州牧)의 교수(敎授)를 지냈다. 이외에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라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된 철검(哲儉),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던 경홍(景弘)·경의(景毅) 형제와 희기(喜麒), 그리고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공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석성군(石城君)에 봉해진 연(連)이 있다.
무신(武臣)으로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 참군(訓練參軍)을 지낸 흡(洽)과 역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칠원 현감을 역임한 시준(時俊),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덕근(德根)이 가문을 빛냈다. 

 

 

구룡1리 마을로 접어드는 길에 우측으로 작은동산에 오련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오련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데, 호성공신(毫聖功臣)의 교서를 반급할 때의 별교서(別敎書)에는 “오련․이희령(李希齡)은 3등에 책훈하고,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資級) 초천(超遷)[직위 등의 등급을 뛰어 넘음]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가계를 올림]하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석성군의 ‘석성’은 충청남도 석성인데 봉작 시 작호는 대체로 본관을 중심으로 한다.

 

구사리 마을에는 석성군을 모시고 있는 석성재(石城齋)가 자리하고 있다.

 

 

석성재는 석성군으로 불리우는 낙안인 오련을 모신 재실이다.

석성재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기가 어렵다. 눈으로는 보이는데 출입구가 잘 보이질 않는다.

민가사이 작은소로가 있어 접근할수 있는데 진입로등을 정비해야 할것 같다.

 

 

석성재라는 현판을 걸고 있다.

지금도 후손들에 의해 관리는 되고있는 듯 하지만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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