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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 통어사 민응식영세불망비(壽洞 統禦使 閔應植永世不忘碑) 본문
이걸 횡재라고 표현을 해야하나? 표충사 내부를 촬영하지 못하여 이리저리 연락하여 수동에 위치한 표충사에 관리하시는 분과 연락이 닿아 사진을 찍기를 원하니 약속시간을 잡았다. 조금 일찍 도착해 담밖에서 경내를 살피다 보니 비석 하나가 들어가는 입구에 서있다. 마침 표충사를 관리하시는 변상진원장님이 오셔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비석에 대해 물으니 당신도 비석에 대하여 아는바가 없다고 하시며 표충사와는 관련이 없는 비석이라고 말씀을 해주신다.
비석의 석질이 좋치않아 글씨를 알아보는데 조금 힘이 들었다.글씨를 자세히 살펴보니 통어사민공응식영세불망비(統禦使 閔應植永世不忘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비의 건립년도는 정확히 알수가 없다.1888년에 민응식이 통어사로 부임을 하여 1890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형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1891년 다시 예조판서로 나아가니 아마 비의 건립시기는1890년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민응식(閔應植)에 대하여 살펴보니
조선의 척신(戚臣). 자는 성문(性文), 호는 우당(藕堂). 본관은 여흥(驪興). 1882년(고종 19) 문과에 급제, 민비의 친척으로 임오군란 때 충주 장호원(忠州長湖院)의 저택을 민비의 피신처로 제공하여 출세의 길을 열었다. 혜상공국(惠商公局)의 총판(摠辦)이 되었고, 위안스카이의 배경으로 민태호(閔台鎬) 등과 결탁하여 독립당에 압력을 가하였으며, 김옥균이 일본 폭력배를 데리고 강화도에 침입한다는 낭설을 유포하여 민심을 소란하게 하였다. 뒤에 척족 세도의 중심 인물로서 민영익(閔泳翊) 등과 같이 위안스카이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운동을 제창, 1891년(고종 28)에는 소위 황두 배상문제(黃豆賠償問題)를 극력 반대, 민병석(閔丙奭) 등과 같이 김옥균 암살을 계획하고 장응규(張應奎)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 후 예조 판서ㆍ호조 판서ㆍ경리사ㆍ통어사ㆍ도총제사 등을 역임, 1905년 여러 척신을 혁신파 인물들과 대치시킬 때 물의가 있어 전라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민응식 [閔應植]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민응식이 청주와 관련되여 이름이 거론되는것은 청주군 산내이면산성 보국사중건기(淸州郡 山內二下面山城 輔國寺 重建記)에 이름이 거론된다
청주 상당산성은 관방의 중요성으로 인해 1716년에 대대적인 수축이 이루어졌으며, 1721년 산성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산성 안쪽에 구룡사(九龍寺)와 남악사를 건립하였다. 두 사찰에는 승려가 거주하면서 수행과 함께 산성의 보수와 기물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나, 이후 구룡사(九龍寺)는 완전히 폐허로 변한고 남악사만이 남게 되었다.
1885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민응(李敏應)이 부임하여 남악사에 거주하던 청한노사(淸閑老師)에게 보수를 명하였고, 이듬해 병마절도사로 부임한 홍재희(洪在羲))가 절을 고치고 보국사라 이름하고 승장(僧將)을 도내총섭(道內摠攝)으로 삼았다.
그해1888년 9월에는 삼도육군통어사(三道陸軍統禦使) 민응식(閔應植)이 부임하여 도내총섭을 삼도도총섭(三道都摠攝)으로 승진시켰다. 1890년에는 박제관(朴齊寬)이 부임하여 산성 보수를 완료하였는데, 이 때 보국사에 군량미 등을 지원하고, 별관(別館) 2칸, 칠성각(七星閣) 3칸, 외삼문(外三門) 칸을 새로이 건립하여 사찰의 규모를 갖추게 하였다.
그러나 1895년 상당산성이 폐쇄되면서 산성은 크게 퇴락하고 성내의 관아 건물은 뜯기어 용화사(龍華寺) 신축의 부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박문호(朴文鎬)의 ‘유상당산성남악사(遊上黨山城南岳寺)’에 따르면 1907년 보국사는 다시 남악사로 바뀌어 불리며 그 때까지도 명맥을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절터는 농경지로 변하여 주변에서 기와편 등이 출토되고 있다.
삼도육군통어사는 1888년(고종 25)에 설치된 군사관계의 외직(外職)이다.
충청병마절도사를 삼도육군통어 겸 충청병사로 바꾸었다. 소속관원은 영관(領官) 2명, 문안(文案) 1명, 군의(軍醫) 1명, 병방(兵房) 1명(청주영장이 겸임), 군사마(軍司馬) 1명(청주판관이 겸임)이었다.
1893년 다시 원래대로 되어 삼도육군통어사는 폐지되고 충청병사만 두었다. 1888년 고종의 강력한 의사에 따라 한 차례의 군제변통(軍制變通)이 있게 되는데, 삼도육군통어사의 설치는 이러한 일련의 군사제도 변화 중의 하나였다, 삼도육군통어사 [三道陸軍統禦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888년 8월 18일 청주는 삼남의 요충지이므로 충청병사를 삼도육군통어사(三道陸軍統禦使) 겸 충청병사로 승격시켰다. 통어사에는 호조판서 민응식(閔應植)을 임명하고, 통영의 실례에 따라 병영을 운영하도록 했다. 삼도의 수군을 통괄하는 통영과 같아 삼도의 육군을 통괄하는 새로운 기구를 만든 것이다.
2년 임기인 삼도육군통어사에는 판서를 역임한 고위직 인물을 선정하였다. 1890년 1월 박제관(朴齊寬)을 청주목사에 겸직시켜서 임명하였고, 1892년 3월에는 이어 김석진(金奭鎭)을 삼도육군통어사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통어영을 친군(親軍)으로 격상시키고 진남영 외사(外使)를 칭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893년 1월 26일 이유는 밝히지 않고 통어영을 갑자기 혁파하였다. 독판내무부사였던 민응식을 다시 통어사에 임명하면서 청주병영의 구례대로 복구하도록 하였다.통어영 중군과 상당 별장은 감원하였고, 청주병사와 우후를 다시 임명하였다. 그리고통어영은 남양부에 이설하여 이를 해연총어사(海沿總禦使)라고 부르게 하였다.
년도로 보아 아마 홍재희의 후임으로 민응식이 오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청주병영에 있던 불망비가 표충사가 이건되면서 그냥 같이 이건된것이 아닐까 하는 사견이다
[모충동 모충사에 있는 1888년에 건립된 병마절도사홍재희의 영세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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