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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면 고마리 고마리공소(沼壽面 叩馬里 叩馬里公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소수면 고마리 고마리공소(沼壽面 叩馬里 叩馬里公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1. 17. 08:24

 

고마리 성당을 찾은 것은 비가 추적거리고 내리는 저녁 무렵이다.

괴산에서 외곽도로를 타고 원남으로 너머 가는 길을 가다가 만나는 동네가 소수면 고마리이다.

고마리 공소는 괴산군 소수면 고마리에 소재하고있다.공소라 함은 본당보다 작은 천주교의 단위교회를 칭하며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지역신자들의 모임을 말한다.

지금은 공소이지만 괴산 최초의 성당이요 충븍에서는 음성 감곡성당에 이어 두번째로 건립된 성당이다.

이 곳에는 천주교 박해시절 이미 교우촌이 형성 되였으며 그것이 중심이 되여 1893년 이전에 공소가 생겼고 이후 신자가 크게 증가하여 1920년에 고마리 성당으로 격상된 천주교의 유서깊은 유적지이다. 

 

초대신부로 1920년에 서품된 윤의병신부가 부임하여 시목하였다.고마리 본당은 괴산 청주 보은 진천 음성지역의 일부등 넒은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그는 이지역을 순회하면서 전교에 힘썼다. 

 

고마리 성당은 단순히 미사와 신자들의 신앙육성만이 아니라 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부설 "숭애의숙(崇愛義塾)" 이라는 사립학교를 건립하여 교육계몽에 나섰다.

초빙된 수녀들이 학교교육을 전담하였는데 이들을 통하여 농촌에 근대교육이 이루어졌다.

 

 

숭애의숙은 알반사람들에게 개방되여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배움을 얻고자 이 곳으로 몰려 들었다.

이에 고마리 일대에는 문맹자가 적었고 더불어 근대의식이 널리 확산되여 나갔다.

 

 

 

1932년 윤의병신부가 경기도 해주 본당으로 떠난후 제 2대 신부로 정원진 신부가 부임했다.

그런데 1936년 증평에 본당이 설립되면서 고마리 성당은 공소로 전락하였다.

 

 

초대 신부 윤의병은 당시 한국인 신부가 1년에 1~2명 많아야 3~4명 배출되던 시기의 신부였는데 그런 귀한 신부가 고마리 성당에 부임하여 시목에 열정을 다하였다. 그는 교육과 신앙을 중시하고 특히 순교자 문제를 깊이 인식하였던 인물로 평가되고있다.1980년 고마리 본당 설정 60주년을 맞아 당시 초대신부로서 신앙운동과 사립교육에 혁혁한 공을 세운 윤의병 신부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공적비를 구내에 세웠다.

 

 

 

 

 

지금의 공소 경당은 고마리 성당 70주년을 기념하여 1992년에 세운 건물이다.

고마리공소가 한낱 시골에 있다하여 그 역사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제 강점기 탄얍을 받던 시절 산간벽지에 생긴 괴산 최초의 성당이라는 장소성과 역사성을 고려하여 역사교육의 장을 조성하여 종교문화에 이해와 교육의 장소로 활용될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괴산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