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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동 병사윤구연마애불망비(龍亭洞 兵使尹九淵磨崖不忘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용정동 병사윤구연마애불망비(龍亭洞 兵使尹九淵磨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1. 23. 23:33

 

충청병마절도사 윤구연은 승정원 일기 85卷, 31年(1755 乙亥 / 청 건륭(乾隆) 20年) 8月 25日(丙寅) 1번째기사
정한규·이길보·서지수 윤구연등에게 관작을 제수하다라고 적혀있다.

 

 ○丙寅/以鄭漢奎爲司諫, 李吉輔爲掌令, 徐志修咸鏡道觀察使, 尹九淵忠淸兵使。

정한규(鄭漢奎)를 사간으로, 이길보(李吉輔)를 장령으로, 서지수(徐志修)를 함경도 관찰사로, 윤구연(尹九淵)을 충청 병사로 삼았다.

 

 

마애비에는 兵使 尹公九淵 不忘碑(병사 윤공구연 불망비)라고 새겨져 있으며 병마절도사 윤구연을 잊지않는 비이다.

비의 건립시기는 영조33년 乾隆 二十二年 十二月 日(건륭 이십이년 십이월 일) 1757년 음력 12월에 새겼다.

마애불망비를 바라보며 좌측에 있는 마애비로 우측에 있는 병마우후 한완의 마애비와 같이 새겼다.


 

 

 

 

 

윤구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우금(牛禁), 주금(酒禁), 송금(松禁) 등 이른바 삼금(三禁)정책이 자주 반포됐다. 우금은 농우(農牛) 도살을 금지하는 것, 송금은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금년같이 큰 가뭄이 찾아올 경우 삼금정책의 하나인 금주령이 선포됐다. 실록을 키워드 방식으로 검색한 결과, 조선시대 경우 총 175건의 금주령이 포고됐다. 역대 왕별로는 성종(31건), 영조(29건), 세종(17건), 중종(14건) 순으로 많았다.

금주령은 △근신 절제로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로하며 △식량과 비용 절약의 목적을 지녔다. 금주령은 가뭄이 심한 봄ㆍ여름에 반포되어 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해제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때로는 10∼12월에도 시행됐다.

또 보통은 중앙 조정의 결정으로 직접 반포됐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관찰사들의 건의로도 반포됐다.

그러나 금주령이 반포된 기간에도 음주나 양조가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국가의 제향, 사신접대, 상왕(上王)에 대한 공상(貢上), 그리고 백성들의 혼인ㆍ제사 및 노병자의 약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됐다.

금주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단속도 사실상 어려웠다. 같은 내용의 국가법령이 175회나 반포됐다는 것은 그것과 비례해 잘 지켜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금주령에 관한한 여느와 다른 임금이 있었다. 바로 영조다. 그는 과도한 양조(釀造)가 곡식낭비 외에 강상윤리와 마풍양속을 해친다고 보았다. 영조는 백성들 사이의 잦은 싸움과 살인사건이 만취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판단했다.

이른바 '주폭'의 폐해인 셈이다. 영조는 재위 34년(1758) 홍화문에 나가 손수 '금주윤음'(禁酒綸音)을 발표했다. 제사상에도 술대신 차(茶)를 쓰도록 명령할 정도로 그의 의지는 확고했다.

英祖 92卷, 34年(1758 戊寅 / 청 건륭(乾隆) 23年) 9月 16日(己亥) 1번째기사
홍화문에 나가 오부의 기로 백성을 인견하고 선시한 친제 금주 윤음

 

○己亥/上御弘化門, 招見五部耆老民人, 下親製禁酒綸音宣示。 略曰:
導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導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噫! 訓豈欺我哉? 且一弛一張, 文武之道不獲已。 特放編配, 減其律名, 申申誨諭, 以冀爾等之感回矣。 昨冬則微有其效, 幾乎無焉。 而命御史遍問, 人皆駭眼, 予自歎曰, ‘予雖涼德至愚, 而神者民也。’ 此奏殿之後, 先諭軍民, 次諭大小臣僚之故也。 此正三代之民直道而行者也。 雖然習俗難以耐久, 每恐法弛, 故命御史廉問江村近畿, 而御史回奏, 暗釀相續, 又有現捉者。 聞此之後, 心切忸焉, 其無拜殿之顔。 先施飭勵之敎, 自此以後, 心不能耐, 不憚其憊。 更命京兆, 召集軍民, 特臨正門, 諄諄誨誘。 吁嗟! 大小軍民, 靜聽此諭。 先諭予過, 次諭爾等之過。 董子云, ‘正心正朝廷正萬民’, 《大學絜矩》之道, ‘其亦自近及遠’ 矣。 今不能正萬民, 寔予不能正心之致者, 亦何顔對爾等乎? 此予過也。 大學豈不云乎? 之民從令, 之民從令, 此由其君之心。 而古人曰, ‘草上之風必偃。’ 今者禁令, 決非反其所好, 則爾等之不從令, 抑何心哉? 此爾等之過也。 噫! 一人編配, 十人望呼。 犯者雖不足恤, 妻孥何辜焉? 此爾等之過也。 人之所以爲人, 其有五倫也。 父呼其子, 子呼其父, 夫呼其妻, 妻呼其夫, 而不知誨誘, 自犯其憲, 抑何心哉? 此爾等之過也。 因一時之慾, 不顧五倫, 自歸於禽獸域, 抑何心哉? 海島邊塞終身而不自恤, 老父老母, 孤兒寡妻, 倚門望呼? 到此之時, 其曰爲人父, 其曰爲人子, 其曰爲人夫, 其曰爲人妻, 爾等其深思之。 遵令而戒酒可乎? 犯令而飮酒可乎? 噫! 予本太寬, 雖螻蟻不忍踐也, 況元元乎? 吁嗟! 此心可質彼蒼。 雖白首暮年, 夙夜眷眷軍民也。 其雖不能違法, 予心若何? 吁嗟! 予心爾等其諒之。 臨御幾十年, 亦無大負於爾等, 抑何心負予若此? 且若無的則無射者, 無逕則無行人, 若無釀者, 何處求飮? 犯禁釀, 賣與飮者, 俱犯邦憲。 市業多岐, 亦何故而捨便而取險乎? 以此言之, 釀者亦無異於飮者。 莫重祭奠, 用醴酒而禁, 則國之興亡, 惟在酒禁之行不行, 非爲爾等非爲邦憲, 此誠興亡攸係。 自徽寧殿今日爲始, 上食依晝茶禮例, 以茶代醴。 特臨正門, 開心曉諭, 爾等咸聽此諭, 莫替予暮年臨門申申之諭。

 

임금이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오부(五部)의 기로(耆老) 백성들을 소견하고, 친히 지은 금주(禁酒)의 윤음(綸音)을 내려 선시(宣示)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덕(德)으로써 백성들을 인도하고 예(禮)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수치를 알고 또 바르게 되지만, 법으로써 백성들을 인도하고 형벌로써 백성들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죄만을 면하려 하고 수치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아! 공자의 이러한 가르침이 어찌 우리를 속이는 것이겠는가? 또 한번 늦추고 한번 죄이는 것은 문무(文武)의 도(道)에서는 부득이한 일이다. 편배(編配)14452) 된 자를 특별히 석방하고 죄명(罪名)을 감한 다음에 거듭거듭 가르치고 타일러서 너희들이 감복하고 마음을 돌이키려고 한다. 작년 겨울에는 조금 그 효과가 있었지만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가 어사(御史)에게 명하여 두루 물어보게 하였더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눈치를 살폈으므로, 내가 스스로 탄식하기를, ‘내가 비록 덕이 적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신기하게 여기는 것은 백성들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전정(殿庭)에 아뢴 뒤에 먼저 군민(軍民)들에게 유시(諭示)하고 그 다음에 대소 신료들에게 유시하는 까닭이다. 이것이 중국 삼대(三代)14453) 의 백성들을 바르게 하여 도(道)가 곧게 행하여졌던 까닭이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습속(習俗)을 오랫동안 유지하기가 곤란하므로, 언제나 법통이 해이하여질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어사에게 명하여 강촌(江村)과 근기(近畿) 지방을 염문(廉問)하게 하였는데, 어사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몰래 술을 빚는 일이 서로 잇달았다.’라고 하였으며, 또 현장에서 체포된 자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들은 뒤로 나는 마음으로 매우 부끄럽게 여겨, 전정(殿庭)에 배알(拜謁)할 면목이 없었다. 먼저 백성들에게 신칙하고 권려하는 하교를 내리는데, 이제부터는 마음으로 능히 참지도 아니할 것이며, 그 고달픔을 꺼리지도 아니할 것이다. 다시 경조(京兆)14454) 에 명하여 군민(軍民)들을 불러 모으고, 특별히 정문(正門)에 나아가서 순순(諄諄)히 가르치고 타이르는 것이다. 아! 대소 군민(軍民)들은 조용히 이러한 유시(諭示)를 들으라. 먼저 나의 잘못을 타이르고, 다음에 너희들의 잘못을 타이르겠다. 동자(董子)14455) 가 이르기를,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조정(朝廷)이 바로잡히고 만민(萬民)들이 바로잡히며, 《대학(大學)》의 혈구지도(絜矩之道)도 그에 따라 또한 저절로 가까와지고 멀어지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능히 만민들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은 바로 내가 능히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여 그러한 것이니, 또한 무슨 면목으로 그대들을 대하겠는가? 이것은 나의 잘못인데, 《대학》에서 어찌 그러하다고 이르지 아니하였던가? 요(堯)임금·순(舜)임금 시대의 백성들이 법령을 따른 것과 걸왕(桀王)·주왕(紂王) 시대의 백성들이 법령을 따른 것도 이것이 그 임금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옛사람이 말하기를, ‘풀은 바람이 불면 반드시 한쪽으로 쓰러지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금령(禁令)은 결코 그 좋아하는 것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대들이 법령을 따르지 아니하는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인가? 이것이 그대들의 잘못이다. 아! 한 사람의 편배(編配)를 열 사람이 지켜 보는 것이다. 법을 범한 자들은 비록 족히 불쌍히 여길 것도 없으나, 그 처자식이야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이것이 그대들의 잘못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다. 아비가 그 아들을 부르고 아들이 그 아비를 부르고, 지아비가 그 지어미를 부르고 지어미가 그 지아비를 부르면서 가르치고 타이를 줄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그 법을 범하는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인가? 이것이 그대들의 잘못이다. 한때의 욕망으로 인하여 오륜을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슨 마음인가? 바다의 절도(絶島)나 변방의 요새(要塞)에서 일생을 마치더라도 스스로 불쌍히 여길 것은 없으나, 늙은 아비와 늙은 어미와 외톨이 아들과 과부 아내가 대문에 기대어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아니하겠는가? 이와 같은 때가 이르면 그 남의 아비가 되거나, 그 남의 아들이 되거나, 그 남의 지아비가 되거나 그 남의 아내가 되는 자의 심정을 너희들은 깊이 생각해 보라. 법령을 따르고 술을 경계하는 것이 옳겠는가? 아! 나는 본래 너무 관대하여 비록 하찮은 땅강아지나 개미조차 차마 발로 밟아버리지 못하는데, 하물며 백성들이겠는가? 아! 이러한 마음을 저 하늘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내가 비록 흰 머리에 나이가 많다 하나, 밤낮으로 마음 속에 잊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은 군민(軍民)들이다. 그들이 비록 능히 법을 어기지 아니하더라도 내 마음이야 어떠하겠는가? 아! 내 마음을 그대들은 잘 헤아리도록 하라. 

 

내가 임어(臨御)한 지 수십 년이지만, 또한 너희들에게 큰 부담이 없었는데, 그대들은 또한 무슨 마음으로 이와 같이 나에게 부담이 되는가? 또 만약 표적이 없으면 활을 쏘는 자가 없을 것이고, 지름길이 없으면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만약 술을 빚는 자가 없다면 어디에서 술을 구해 마시겠는가? 술 빚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범하고 술을 팔거나 술을 마시는 자는 모두 나라의 법을 범하는 것이다. 시업(市業)이 여러 가지인데, 또한 무슨 까닭으로 편한 업종을 버리고 위험한 업종을 택하는가? 이로써 말한다면 술을 빚는 자도 또한 술을 마시는 자와 다를 것이 없다. 막중한 제사의 전례(奠禮)에는 예주(醴酒)14456) 를 사용하고 술을 금지하니, 나라의 흥망이 오로지 금주(禁酒)가 행하여지고 행하여지지 아니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므로, 그대들이 나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아니되는데, 이것은 진실로 나라의 흥망이 달린 문제이다. 휘령전(徽寧殿)에서부터 오늘부터 시작하여 상식(上食)은 주다례(晝茶禮)의 예에 의하여 차(茶)로써 예주(醴酒)를 대신하도록 하라. 내가 특별히 정문(正門)에 나아가서 마음을 터놓고 효유(曉諭)하는 바이니, 그대들도 모두 이러한 효유를 듣고, 내가 늙은 나이에 정문에 나아가니 거듭거듭 당부하는 유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
하였다.[승정원일기]



"휘령전에서부터 오늘부터 시작하여 상식은 주다례의 예에 의하여 차(茶)로써 예주(醴酒)를 대신하도록 하라. 내가 특별히 정문에 나아가서 마음을 터놓고 효유하는 바이니, 그대들도 모두 이러한 효유를 듣고, 내가 늙은 나이에 정문에 나아가니 거듭거듭 당부하는 유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

이때 시범 케이스로 걸려든 인물로 윤구연(尹九淵·?~1762)이 있다. 영조의 윤음은 엄포가 아니었고 그는 숭례문에서 금주령을 어긴 죄로 참수를 당했다.

"임금이 숭례문에 나아가 남병사(南兵使) 윤구연(尹九淵)을 참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성이 술 냄새가 나는 빈 항아리를 가지고 임금 앞에 드리자, 임금이 크게 노하여 친히 남문에 나아가 윤구연을 참하였던 것이다."-<영조실록>

인용문 중 '남병사'는 함경도 북청지방에 파견됐던 병마절도사를 말한다. 윤구연은 남병사 직전에 우리고장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는 등 전도가 양양했던 무신이었다.

"정한규를 사간으로, 이길보를 장령으로, 서지수를 함경도 관찰사로, 윤구연을 충청병사로 삼았다."-<영조실록>

 

 

 

조선 영조-순조 연간의 인물로 성대중(成大中·1732∼1812)이 있다. 그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할 처지였으나, 신분상승 운동의 일종인 서얼통청에 힘입어 관료가 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저서 중에 '청성잡기'(靑城雜記)라는 것이 있다.

'윤구연의 점괘는 삼남에 죽을 것(死於三南)이라고 나와 있는데, 그가 삼남 지방의 관직에 부임하지는 않았지만 남병사(南兵使)로 부임하여 남태회의 상소에 의해서 남대문(南大門)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남아있다.'-<청성잡기>

실록에도 충청도 병마절도사 출신인 윤구연이 당시 대사언이던 남태회(南泰會·1706∼1770)의 상소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나타난다.

 

英祖 100卷, 38年(1762 壬午 / 청 건륭(乾隆) 27年) 9月 17日(丙子) 1번째기사
남병사 윤구연을 참하다

○丙子/上御崇禮門, 斬南兵使尹九淵。 先是, 上命金吾郞拿來九淵, 又命宣傳官趙峸倍道馳往, 執捉釀酒之眞贓。 至是以有酒臭, 空壺來納於上前, 上大怒, 親御南門, 斬九淵。 領議政申晩, 左議政洪鳳漢, 右議政尹東度上箚救之, 上不賜批, 幷罷相職。

 

임금이 숭례문(崇禮門)에 나아가 남병사(南兵使) 윤구연(尹九淵)을 참(斬)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금오랑(金吾郞)에 명하여 윤구연을 잡아오게 하였고, 또 선전관 조성(趙峸)에게 명하여 배도(倍道)로 빨리 가서 양주(釀酒)한 진장(眞贓)을 적발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르러 조성이 술 냄새가 나는 빈 항아리를 가지고 임금 앞에 드리자, 임금이 크게 노하여 친히 남문(南門)에 나아가 윤구연을 참하였던 것이다. 영의정 신만·좌의정 홍봉한·우의정 윤동도가 차자를 올려 구원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모두 상직(相職)을 파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남태회가 아뢰기를, "남병사 윤구연은 자신이 수신이면서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지엄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멋대로 범양하여 매일 술에 취한다는 말이 낭자합니다. 이와 같이 법을 능멸하는 무엄한 사람을…"'-<영조실록>

윤구연이 즉시 체포돼 한양으로 이송됐고, '멋대로 범양하여 매일 술에 취했다'는 증거를 찾기위한 수색작업이 벌어졌다. 그 결과, 윤구연의 근무처에서 '술냄새 나는 항아리'가 발견됐다.

문제는 '술냄새 나는 항아리'가 금주령 이전에 술을 담갔다는 것이었다. 금주령 때문에 윤구연을 참수한 것은 너무 지나쳤다는 주장과 함께 '금주령 이전에 담근 술'은 두고두고 조정의 논란거리가 됐다.

'윤구연은 금주할 때에 술병을 가졌다 하여 선전관에게 잡혀 와서 남문 밖에서 효시 되었는데, 사건이 금령 전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으므로, 이때에 와서 이 명령이 있게 되었다.'-<영조실록>

윤구연은 억울하게 참수된지 12년만에 신원됐으나 목숨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정철의 '재너머 성권롱' 시조처럼 술을 너무 좋아한 것이 죄였다.

'재너머 성권롱 집의 술닉닷 말 어제 듣고 / 누은 쇼 발로 박차 언치 노하 지즐타고 / 아해야 네 권롱 겨시냐 뎡좌수(鄭座首) 왓다 하여라'-<정철의 시조>

영조가 전혀 술을 하지 못했을까 여부도 궁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정황상 폭음 정도는 아니지만 술을 전혀 못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명겸이라는 신하가 "가만히 여항에 전해진 말을 들으니, 혹은 성상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한다는데, 신은 그 허실을 알지 못하겠지만 오직 바라건대, 조심하고 염려하며 경계함을 보존토록 하소서"(영조실록)라는 말을 한다.

인용문의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한다는데'라는 표현이 왠지 '아니땐 굴뚝의 연기'처럼 비춰진다. 그러자 영조는 "내가 목을 마를 때에 간혹 오미자차를 마시는데, 남들이 간혹 소주인 줄 의심해서 이다"라고 일단 부인을 했다.

뒤이어 등극한 정조는 음주문화에 비교적 관대, 여간해서는 금주령을 내리지 않았다. 영조와 정조는 여로모로 대비되고 있다.

"크게 술을 빚는 것과 가정에서 술을 파는 것은 이미 판윤으로 하여금 금단하게 하였으니, 이 일은 유사(有司)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일이므로 조정에서 별도로 금령을 내릴 필요는 없다."-<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