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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동 병마우후 한완 마애불망비(龍亭洞 兵馬虞候 韓梡 磨崖不忘碑)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용정동 병마우후 한완 마애불망비(龍亭洞 兵馬虞候 韓梡 磨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1. 24. 08:54

 

상봉재 옛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왼쪽으로 암벽지대를 만나며 마애불망비를 만날수 있다.

한완의 불망비는 2기의 마애비중 비석을 바라보며 우측의 비석이다.

영조 31년 3월 19일 (임진) 원본1117책/탈초본62책 (8/13)

에 승정원일기에 한완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한 완(韓 梡)은1755년 乾隆(청/고종)20년에 충청병우후(忠淸兵虞候)로 제수된다.

○ 兵曺口傳政事, 以金亨魯爲副摠管, 李潤德爲兼司僕將, 李漢昌爲都摠經歷, 李泓爲都摠經歷, 金光漢爲訓鍊判官, 許浹爲訓鍊主簿, 洪若泌爲武兼, 洪若水爲兼司僕將, 李啓祥·李儒弘爲武兼, 韓梡爲忠淸兵虞候, 杜世恭爲舒川萬戶, 印信武爲正方別將。副司果李文德陞六事, 承傳, 副司直申晦·李殷福·李漢豐爲宣傳官

1755년 乾隆(淸/高宗) 20년


 

 

 

마애비에는 兵馬虞候 韓 公 梡 不忘碑(병마우후 한 공 완 불망비)라고 각자되여 있으며 경국대전에 의하면, 병마우후는 외관직인 절도사‧평사와 함께 근무일수가 720일이었다. 그러므로 마애비는 한완이 병마우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때 새겼을 가능성이 많다.  

마애비는 乾隆 二十二年 十二月 日(건륭 이십이년 십이월 일) 영조 33년 1757년 음력 12월에 새겼다.



 

병마우후(兵馬虞候)는 조선시대 서반 무관 외관직이다. 각 도에 두었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兵使)와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水使) 밑에 두었던 부직(副職)으로, 병마우후 (兵馬虞候)는 종삼품(從三品)으로 병우후(兵虞候)‧아장(亞將)이라고 하였고, 수군우후(水軍虞侯)는 정사품(正四品)이었다.

1466년(세조 12) 관제개혁 때 병마도절제사의 막료로 있던 도진무는 병마우후로, 수군도안무처치사도진무(水軍都安撫處置使都鎭撫)는 수군우후로 이름을 바꾸었다.


우후는 관찰사가 겸임하는 병사(兵使)나 수사(水使) 밑에는 두지 않고 전임(專任)의 병사와 수사 밑에만 1원씩 배치하였는데, 후기에 이르러 부장(副將)인 중군(中軍)을 두면서 관찰사가 겸하는 병사‧수사 밑에는 중군을 두고, 전임의 병사‧수사의 중군은 우후가 겸임하였다.


병마우후는 충청병영(忠淸兵營: 海美, 후에 淸州), 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 蔚山),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 昌原, 후에 晉州), 전라병영(全羅兵營: 康津, 때로 長興), 영안북병영(永安北兵營: 鏡城), 평안병영(平安兵營: 寧邊)에 각 1명씩 두었다.


수군우후는 충청수영(忠淸水營: 保寧),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 東萊),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 巨濟, 후에 忠武),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 梧桐島), 전라우수영(全羅右水營: 海南)에 각 1원씩 두었다.


병사나 수사가 없을 때 도내의 군사에 관한 모든 일을 다루는 것 이외에도 수시로 도내를 순행하면서 군사배치, 지방군 훈련, 군기의 정비 등을 살피고, 명령전달과 군량‧군자의 관리를 담당하는 등의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외관직인 절도사‧평사와 함께 근무일수가 720일이었다. 우후를 지낸 자는 훈련원정(訓練院正: 正三品)에 추천되는 등 무관이 진급하는 데 중요한 경로였다. 1895년(고종 32) 절도사와 함께 폐지되었다.[대전회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