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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면 읍내리 현감 전유형존성비(淸安面 邑內里 縣監 全有亨尊聖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청안면 읍내리 현감 전유형존성비(淸安面 邑內里 縣監 全有亨尊聖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2. 3. 19:42

 

전유형은 조선 선조때 청안현감을 지낸 인물이다.존성비는 근래에 새로 조성하였다.유교에서 말하는 존성비(尊聖碑)란 최고의 존경심으로 높은 뜻을 기리는 의미있는 비석이다,청안향교와 전유형의 관계는 알수가 없다. 조선왕조실록 선조27년 1594년(갑오)에 보면 전유형이 선조를 배사하자 군량마련과 군사징발방법등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 있다.

 

淸安縣監全有亨拜辭, 上引見。 上御便殿, 引見全有亨, 上曰: “爾勿俯伏, 宜起坐, 爾勿低聲, 宜高聲以言。 爾往爾邑, 正當民散穀乏之時, 何以設施?” 有亨曰: “小臣才不足, 何能有爲? 但欲效死奉職。 淸安一縣, 焚蕩太甚。 臣意謂全減貢稅, 今聞只半減而已。” 上曰: “其然乎? 予未知之矣。” 有亨曰: “本邑民生, 太半飢死, 必有糧餉然後, 可以賑活, 有種子然後, 可以耕種。” 上曰: “此邑可得聚軍乎?” 有亨曰: “淸安, 雖小邑, 可得丁壯二百。 若有糧, 何患無軍?” 上曰: “何以則可得糧乎?” 有亨曰: “聞洪州儲穀稍多。 若移其穀於公州, 移公州之穀於淸安則可矣。” 上曰: “爾若養兵, 則可以得其死力, 使之入於水火乎?” 有亨曰: “以臣之才, 何能至此? 若使養之, 可以臨戰不走也。” 上曰: “當今所當爲者, 爾可盡言。” 有亨曰: “近觀聖明所爲, 使民心感激, 宜若可爲。 但民無可資而生者, 無復可爲矣。” 上曰: “爾所言者, 以今日爲無可奈何乎?” 有亨曰: “然。” 上曰: “諉諸無可奈何, 而束手坐視可乎?” 有亨曰: “上敎至此, 臣民之福也。 天高聽卑。 天若助之, 何事不成?” 上曰: “天不足恃。 伯顔渡何, 潮水三日不至。 乃夷狄也, 天何助之? 雖惡德, 豈不愈於夷狄乎?” 有亨曰: “有君子迭出, 而爲小人離間, 不能展其志, 使國勢傾覆, 雖夷狄, 天或假手矣。” 上曰: “伯顔將十萬, 如將一人云。 何能如是?” 有亨曰: “古人多如此。 韓信亦多多益善。 若先執紀律, 使人心不搖, 千萬人, 可得如使手足。 《書》曰 ‘予有臣三千, 惟一心。’ 若使之一心, 雖多何難?” 上曰: “何以則可得內而活民, 外而討賊?” 有亨曰: “不過得人。 方伯可以制一道, 守令可以治一邑, 儻能得人, 而使民皆一心, 可使制挺以撻。 趙簡子尹鐸, 使晋陽沈竈産蛙, 而民無叛意, 此其驗也。” 上曰: “爾言, 得人心則事可成, 五百義士, 同日效死, 而田橫何其無所成乎? 有亨曰: “高帝能得天下心, 而天命歸之, 只將五百心, 何能與相較乎? 古人或曰: ‘五百之死, 有戰國氣習而然也。’” 上曰: “忠淸道逆黨甚熾云, 當何以爲之?” 有亨曰: “民將飢死, 漸結黨類, 以至於此, 勢所然也。 今若得其魁首, 脅從罔治, 則賊黨自至散落。 《易》《離》至明之卦也, 恐其過於明, 故有折其首無咎之言。” 上曰: “爾之爲國盡心, 必不待予言。 但予欲徐觀爾設施, 如有所言, 不以外官爲拘, 封疏以獻。” 有亨曰: “草野危言, 折首不悔, 臣何敢以外官, 不盡言哉?” 上曰: “古人云 ‘一見如舊。’ 予未曾一見爾面目, 然予知爾之盡心予事也。” 因賜弓矢及藥物。
【태백산사고본】 28책 47권 12장 B면

 

청안 현감(淸安縣監) 전유형(全有亨)이 배사(拜辭)하니, 상이 인견하였다. 상이 편전에 나아가 전유형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그대는 부복(俯伏)하지 말고 일어나 앉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지 말고 큰 목소리로 말하도록 하라. 그대가 지금 맡은 고을로 가는데 백성은 흩어지고 곡식은 모자라는 때를 당하였으니 어떻게 설시(設施)할 작정인가?”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소신은 재능이 부족하니 어떻게 일을 조처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목숨을 바쳐 직책을 수행하려 할 뿐입니다. 청안현은 분탕된 것이 너무도 극심하므로 신의 생각에는 공세(貢稅)를 전부 견감해야 할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 들으니 반만 감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였는가? 나는 모르고 있었다.”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본읍 민생의 태반이 굶어 죽었으므로 양향(糧餉)이 있어야 진구하여 살릴 수가 있고 종자가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고을에서 군사를 모을 수가 있겠는가. ?”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청안이 비록 작은 고을이긴 하지만 장정 2백 명을 모을 수는 있습니다. 군량만 있다면 군사가 없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양곡을 구득할 수가 있겠는가?”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홍주(洪州)에는 저축한 곡식이 약간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곡식을 공주(公州)로 옮기고 공주의 곡식을 청안으로 옮기게 하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군대를 양성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사력(死力)을 바쳐 물불을 피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신의 재능으로 어떻게 그런 지경에 이르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러나 군대를 기르게 하신다면 싸움에 임하여 달아나지 않게는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해야 될 것에 대해 그대는 다 말하라.”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근래 성명(聖明)께서 하시는 일을 보건대, 민심을 감격시키는 일은 할 수 있으나 백성들이 의지하여 살아갈 길이 없는 것은 다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하는 말은 오늘날의 상황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인가?”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그러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찌할 수 없다고 하여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해서야 되겠는가?”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상의 가르침이 이러한 데에 이르렀으니 이는 신민의 복입니다. 하늘이 높아도 낮은 곳의 소리를 듣습니다. 하늘이 도와준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늘은 믿을 수가 없다. 원(元)나라백안(伯顔)이 하수(河水)를 건널 적에 조수(潮水)가 3일이나 이르지 않았다. 원나라는 이적(夷狄)이었는데도 하늘이 어찌 도왔는가? 송(宋)나라는 악덕(惡德)이 있었지만 이적보다는 낫지 않은가?”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송나라는 군자가 배출되었지만 소인들에게 이간당하여 그 뜻을 펴지 못하여 국세가 경복(傾覆)되게 하였으니, 원나라가 아무리 이적이지만 하늘이 혹 원나라의 손을 빌린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백안이 10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으면서도
1인을 거느린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옛사람에는 이런 이들이 많았습니다. 한신(韓信)도 많을 수록 좋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기율(紀律)을 확립하여 인심이 동요되지 않게 한다면 천만인이라도 자신의 수족(手足)처럼 부릴 수가 있습니다. 《서경(書經)》에도 ‘나는 신하 3천이 있는데 오직 한마음이다.’ 하였습니다. 사람들을 한마음이 되게 만든다면 아무리 많은들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면 안으로는 백성들을 구활하고 밖으로는 적을 칠 수가 있겠는가?”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인재를 얻는 것에 불과합니다. 방백(方伯)은 일도(一道)를 제재하고 수령은 일읍(一邑)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니 만일 인재를 얻어 백성이 모두 한마음이 되게 한다면 몽둥이를 만들어 적을 격퇴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조간자(趙簡子)윤탁(尹鐸)을 임용하여 진양(晉陽)을 다스리게 하자, 부엌까지 물이 차 개구리가 새끼를 낳았어도 백성들이 배반할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 그 좋은 증거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에 의하면, 인심을 얻으면 일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5백 명의 의사(義士)가 같은 날 목숨을 바쳤는데도 전횡(田橫)은 어찌하여 이룬 것이 없었는가?”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고제(高帝)는 천하의 인심을 얻어 천명(天命)이 그에게 돌아왔고 전횡은 단지 5백명의 마음만 얻었을 뿐2315) 이었으니 어떻게 한(漢)나라와 비교가 되겠습니까. 옛사람 주에는 혹 ‘5백 명이 죽은 것은 전국 시대에 기습(氣習)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고도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충청도의 도적이 매우 치성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조처해야 되겠는가?”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굶어 죽게 되었으므로 점차 무리를 지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인데 이는 사세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제 그 괴수를 잡고 위협에 의해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면 적도들이 저절로 흩어질 것입니다. 《역경(易經)》의 이괘(離卦)는 지극히 밝은 괘인데, 그 밝음에 지나침이 있을까 염려하여 우두머리만 베고 졸개는 베지 않으면 허물이 없으리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 하려면 내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단 내가 그대의 설시(設施)를 서서히 살펴보겠다. 만일 할 말이 있으면 외관(外官)이라는 데 구애되지 말고 봉소(封疏)로 바치도록 하라.”
하니, 유형이 아뢰기를,
“초야에 있는 사람도 바른말을 하다가 머리를 베이게 되어도 후회하지 않는 법인데 신이 감히 외관이라는 것으로 끝까지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이 ‘한번 만났어도 오래된 사이 같다.’고 하였는데 내가 일찍이 그대의 얼굴을 한번도 본적이 없지만 그대가 나의 일에 마음을 다할 것을 알겠다.”
하고, 인하여 궁시(弓矢)와 약물(藥物)을 내렸다.  

 

 

전유형(全有亨: 1566∼1619)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의(儒醫)이다. 자는 숙가(叔嘉), 호는 학송(鶴松), 본관은 평강(平康)이며 전망(全網)의 아들이다. 유생(儒生)으로 선조 25년 (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 싸웠다. 1594년 청안현감이 되고, 선조 38년(1605) 문과 정시(庭試)에 장원급제하여 감찰(監察)이 됐는데, 명나라에서 군량미 10만석을 요구하자 특차사(特差使)로 명나라에 들어가 이를 줄이는데 공헌했다. 광해군 때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권신(權臣) 이섬(李贍)의 목을 벨 것을 주장했다가 그의 배척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인조 2년(1624)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무고(誣告)를 받아 성철(成哲) 등 37명과 함께 참형(斬刑)을 당했는데, 인조 6년(1628)에 신원(伸寃)이 됐다. 의술(醫術)에도 능하여「오장도(五臟圖)」를그렸다. 시호(諡號)는 의민(義敏)이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괴산의 화암서원(花岩書院)에 제향(祭享)됐다. 묘소는 괴산군 소수면 소암리에 있는데, 도암(陶菴) 이재(李縡)가 지은 묘표(墓表)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염재(念齋) 정실(鄭實)이 지은 비문(碑文)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