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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면 읍내리 현감조흡선정비(淸安面 邑內里 縣監趙潝善政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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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면 읍내리 현감조흡선정비(淸安面 邑內里 縣監趙潝善政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2. 4. 12:27


조선조 인조시대때 청안현감을 지낸 조 흡(趙 潝,)의 선정비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현감조흡선정비(縣監趙潝善政碑)라고 음각되여 있으며 비석은 두동강이 나서 접합하여 놓았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조흡은 인조7년(1629년)에 청안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음을 알수있다.

''''淸安縣監趙潝, 慈祥廉潔, 自奉甚簡, 凡干民役, 任其爲民甚便之, 稱善不已, 皆以爲, 若失此倅, 吾何以生哉云云。但賦役多滯, 官無宿儲, 日用難繼, 經過極艱云, 蓋悅民之意爲主, 而奉公之意未至, 若此者去之, 則民情缺望, 存之, 則官事無可擧之期爲白齊。□-----



조흡은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자()는 흡여(潝如)이다. 할아버지는 홍문관응교 정기(廷機)이고 아버지는 임천군수 조수익(守翼)이다. 광해군 말에 등용되어 승문원정자가 되었다.김류(金鎏) · 이귀(李貴) 등이 반정을 꾀함을 알고 이에 호응, 벼슬이 없는 사람으로 이천(伊川)으로 가서 방어사 이중로(李重老)와 군병을 모아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인조가 즉위하자 등극경과(登極慶科)의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했으나, 얼마 후 시험을 무효로 하는 바람에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반정의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녹훈되어 6품관에 초수(超授), 종부시주부가 되었다.이어 장례원사평 · 양구현감을 역임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는 강도(江都)로 인조를 호종하고 형조좌랑을 거쳐 청안현감으로 부임, 치적이 현저하여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이어 창평현령을 역임하고, 부평도호부사 · 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쳤다. 1644년에는 특지(特旨)로 공조참의에 발탁되었으며, 여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임하였다. 16465월 다시 훈맹(勳盟)에 참여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풍안군(豊安君)에 봉해졌으며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다.그러나 부윤으로 재직 중 술을 폭음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수어사 이시방(李時昉)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뒤에 간성군수 ·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역임하고, 효종 때에는 한성부좌윤으로 있다가 효종2(1651) 범법자를 다스리지 못하고 탐학(貪虐)한다고 탄핵을 받아 다시 파직되었다.1654년부터 한성부와 도총부에서 거의 7년 간 몸담았다가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국조고실(國朝故實)에 밝았고, 저서로 풍안군일기(豊安君日記)가 있다. 시호는 경목(景穆)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