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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면 읍내리 현감서사원청덕비(淸安面 邑內里 縣監徐思遠淸德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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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면 읍내리 현감서사원청덕비(淸安面 邑內里 縣監徐思遠淸德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5. 12. 5. 11:19


조선조 청안현감을 지낸 서사원(1550~1615)의 선정비이다

선정비의 전면에는 현감서공사원청덕비(縣監徐公思遠淸德碑)라고 음기되여 있다.

낙재(樂齋)의 본관은 달성이며 자는 행보, 호가 낙재인데 한강정구에게서 글을 배우고 여헌, 장현광, 정경세 등과 도의의 교분을 가졌다.

낙재는 선조17년(1589) 익위(익위-세자익위사에 소속된 정5품의 벼슬) 를 거쳐 호조정랑에 올랐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워 임란중에 청안현감에 임명되어 문교를 진흥하였다. 음직(도학道學으로 예조에 천거됨)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서사원의 본관은 달성(達城) 이고 현감공파이다. ()는 행보(行甫)이고 호는 낙재(樂齋)이며 할아버지는 응기(應期)이고 친아버지는 훈도를 지낸 흡()인데 큰아버지 진사 형()에게 양자로 갔다. 어머니는 인천 이씨이고 부인은 죽산 박씨이다.

음직으로 동몽교관, 선공감감역을 하였고 임진왜란 때인 1595년 청안현감에 제수되어 부임하니 병화(兵禍)로 백성들이 살기 어려워 이산(離散)하므로 의()를 내세우고 예()로 백성을 대하니 유화(儒化)가 크게 행하여졌다.

관찰사가 포상을 하고 소문이 근방에 자자하여졌으며 백성들이 덕비를 세웠다. 이어 개녕, 옥과, 연기현감에 잇달아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세자익위사 사어, 호조정랑, 형조정랑, 사헌부지평을 지냈다.

철종14(1863) 이조참의에 추증되었고 대구 이강서원과 청안 구암서원에 봉향(奉享)되었다.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악재(樂齋),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아버지는 훈도공(訓導公) 서흡(徐洽)이며, 7세에 큰아버지 서형(徐浻)에게 입양되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주자학 및 이황(李滉)의 문집을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에는 후진 양성에 힘썼다. 선조 때 학행으로 추천되어 감역·찰방을지내고, 1595년(선조 28) 청안현감(淸安縣監)에 제수되었다. 당시는 왜구의 침입을 받은 뒤라
어려운 점이 많았으나 정무(政務)에 힘쓰고 떠돌아다니는 백성을 편안하도록 모았으며, 향교를 가장 먼저 수리하여 봄·가을의 제향(祭享)을 예에 따라 시행하였다. 또한 성황(城隍)·여단(厲壇)의 제사 등 관에서 행하는 여러 가지 일에 모두 갖추어 대비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매월 일정한 날에는 학사(學舍)에 나아가서 스스로 구두(句讀)를 강해(講解)하고 시문(詩文)을 익히게 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1598년(선조 31)에 관직에서 사임하였다. 그 후 개령(開寧)·옥과(玉果)·연기(燕岐)의 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또한 형조·호조 정랑, 익위사어(翊衛司禦), 역학교정(易學校正)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구계서원(龜溪書院)은 1955년에 현재의 청주시 흥덕구 분평동에 이건하여 재창건되었다. 저서로는 『악재집(樂齋集)』이 있다.[괴산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