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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미면 공이리 본문
충주시 살미면 공이리의 가을풍경 입니다.
“공이마을자랑비”
명산첩첩 아늑한 곳 정기서린 별천지에 암소바우 공잇굴 등 가는곳이 명승이고 인성도 순후하며 꽃과 새가 어울리니 도원경이 여기로다.이름난 천하절경 월악공원 충주호는 내 고장의 상징이며 이 나라의 자랑이라.우리고장 복된 이 땅 아끼고 가꾸어서 영원히 보존하리. 1991. 10. 3 공이리 주민일동
공이리 성황당은 살미면 용천 삼거리에서 충주-단양간 36번 국도의 충주호변에 개설된 포장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공이대교를 건너게 된다. 다리를 건너면서 좌우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때 우측으로 돌아서 들어가면 바로 공이마을 자랑비가 나온다. 이곳에서 계속 도로를 따라 계곡으로 들어가면 공이동을 들어오는 입구에 비슷한 크기의 바위 둘이 도랑 한가운데에 버티고 있다. 이 바위를 암소바위 혹은 암수바위라고 하는데, 그 앞에 성황당이 있다. 이 성황당은 근래에 다시 지은 것으로 돌계단 위에 시멘트로 기단을 만들고 목조로 벽을 만들었으며 지붕은 기와로 이은 단칸 건물이다. 정면 위쪽에 성황당(城隍堂)이라고 써 놓았고 대들보에‘西紀一九九九年十二月十九日午時?柱上梁’이라고 상량문을 써 놓았다.
공이동 계곡은 피서지로도 유명한곳인데 암소바위의 전설이 몇 가지전해 내려오고 있어 흥취를 도와주는 곳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계기로 혼란하던 고려조가 급속도로 기울어지기 시작할 때 불타는 듯한 계곡을 따라 천고(千古)의 신비를 안은 추색가경(秋色佳景)의 단풍을 조용히 감상하는 노장이 있었다.그는 다만 이진사(?進士)라고만할 뿐 내력을 자세히 아는 사람이없었으나 그의 품골(品骨)로 보아서 일개 진사 벼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만 했다. 그가 데리고 있는 종자(從者)들도 모두 점잖고 품위가있어 보였다. 신당리 삿갓벌을 지나 계곡으로 들어선 일행은 공이동 어귀에서자리를 정하고 지형을 살피더니 건너편이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 터를 닦기 시작했다.그곳에 아담한 정자가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이 노인은 그곳에서 화문석을 깔고 계곡 승경을 감상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사람들은 그가있는 곳을 가리켜 신선이 단풍을 구경한다고 해서 선관정(仙觀亭)이라 불렀다.그런데 이 노인은 경치는 좋고 맑은데 수석(水石)이 한데 어울리는 풍치가 없는 것을 아쉬워해서 이곳에 바위를 하나 갖다 놓을 것을 일렀다. 그러자 얼마후 종자가 경상도 땅 진해에 이곳 경승에 어울리는 바위가 둘 있는데, 그것을싣고 오려면 개골산 정기를 받고 태어난 암소라야 한다. 그런데 그 암소의 소재를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이 노인은 눈을 감고 잠시 묵상에 잠기더니 이윽고“합천 가야 땅 구미(九美)고을에 가면 그 암소를 구할 것이니 싣고 오라”고 했다. 마침내 그곳으로 달려간 종자들은 천 냥을 주고 암소를 구해 진해 고을에들어가 두 바위를 암소 등에 싣고 오게 되었다.소가 바위를 싣고 선관정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이 일고 지나가자 암소는 바위에 앞발을 딛고 우뚝 서서 하늘을 바라보다가 천둥소
리가 멎자 비호처럼 능선을 달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그 때 암소가 딛고 섰던 자리에 발자국이 찍혀 오늘에 이른다고 하며‘ 지금이곳에 있는 두 바위를 ’암소가 싣고 온 바위‘ 라고 해서 암소바위라고 부르게되었다 한다.
그리고 그곳에 선관정을 짓고 자적하던 이 노인은 고려조에 벼슬하던 술자도인(術者道人)으로서, 고려가 망함에 따라 세상을 버리고 문하생을 데리고 선인지혈(仙人之穴)을 찾아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이다. 그가 지었다는 선관정은 간곳없으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새로이 연안이씨 일족이 정자를 세웠다.
또한 설에는 고려 말기에 이곳을 찾아든 술자도인 한사람이 산세를 보니 풍요번비형(風遙飜飛形: 바람에 흔들려 나부끼는 형)이라서 크게 놀라 사람들을시켜 바위 2개를 굴려다가 이곳 아래 기슭을 눌러 놓음으로써 바람이 불어도흔들리거나 날아가는 일이 없도록 했다고 하는데, 그로 인해서 이곳 대미산(大眉山)을 기점으로 하는 각 능맥(陵脈)은 아직까지 산사태로 인한 피해를 입은일이 없다고 전한다.
또 한 가지 전설은 옛날 신당리 수용목에 한 내외가 소를 기르며 농사를 짓고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남편은 유명한 구두쇠로서 몰인정하기 짝이 없었다. 자기 집 식구나 가축들이 먹는 것조차 아까워하면서도 일만 혹사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자연히 그 아내는 배를 줄이며 험한 음식으로 견디고 살아갔는데,그러면서도 자기 남편과 소에게 정성을 다하며 살고 있었다.그러자니 때로는 배고픔을 참다못하여 소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소와 같이초근목피를 나누어 먹기도 하였으며, 그러는 동안에 그 아내는 배의 식량(食量)이 많아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남편은 항상 자기 아내 식량이 너무 많은 것을 책하며 입버릇처럼「쇠배지」라고 욕을 퍼붓는 것이었다.
어느 가을날 남편이 누렇게 익은 콩을 한 짐 꺾어 왔다. 아내는 그 콩을 까서밥에도 놓았지만 농사에 골몰하는 소 생각이 간절해서 소에게도 몇 번 삶아 주었다. 어느 날 남편은 그 콩이 어떻게 해서 다 없어졌느냐고 화를 내고 을러댔다. 아내는 자기가 모두 먹었노라고 대답을 했으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아내에게 발길질을 하였으며 연약한 여인인지라 쓰러져 신음하다가 급기야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남편은 얼마 후에 딴 여자를 후처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밥먹는 것이 안보였으므로 내심 퍽 기뻐하면서 밥 적게 먹는 것을 칭찬하였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식량이 턱도 없이 줄어드는 것을 깨닫게 되어 남편은 다시 의심이 생기었고, 그 후로는 숨어서 아내의 거동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인가 아내는 틈만 있으면 양식을 가져다 소와 함께 먹어 치우는 것이었다. 의외의 사실에 놀란 남편은 노기가 충천해서 그 여자도 죽여 버리겠다고 마음먹는 순간 이상한 육감이 머리를 스치며 불운으로 죽어간 아내의 생각이 떠올랐다필경 먼저 아내의 넋이 환생해서 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남편은 자기도
모르게 합장을 하고 두 무릎을 꿇고 눈을 감았다. 얼마 후 눈을 떠 보니 벌써 사람은 없고 소 두 마리가 공이동 쪽으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목이메인 남편은「여보! 여보!」하며 따라갔는데 어느 지역까지 오더니 두 마리의 소는 두 개의바위로 변하고 말았다.그 후 이 바위를「암소바위」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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