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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정면 지장리 정호묘(佛頂面 芝莊里 鄭澔墓)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불정면 지장리 정호묘(佛頂面 芝莊里 鄭澔墓)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3. 8. 09:52

 

불정면 지장리 석정 흑석골에 있는 조선조의 문신인 정호선생의 무덤이다.돌우물이라 불리우는 석정리 안쪽인 흑석골에 자리하고 있다. 석정리 마을회관에 차를 세우고 농로를 따라 걷는다 . 멀리 사당이 보인다.

 

정호의 묘가 있는 석정리는 괴산군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세곡리 서쪽은 세평리 남쪽은 덕촌 북쪽은 목도리와 접하고 있다.본래 충주군 불정면 지역인데 1895년(고종32)에 괴산군에 편입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지장리로 하였는데 1961년 행정리동 세분화로 석정으로 분리되었다.일명 돌우물로 불리우며 돌에서 물이 솟았다고 한다.그래서 석정(石井)이란 이름으로 바뀌였다. 마을입구에 방죽에는 가시연꽃 자생지로 유명하다.

 

 

 

 

 

 

장암 정호의 무덤은 사당뒷쪽의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사당은 근간에 새로 세웠다.

 

 

 

흰눈이 내려앚은 정호의 무덤이다. 무덤의 비석에는 비석에는 유명조선영의정문경공장암정선생묘정경부인최씨부좌(有明朝鮮領議政文敬公丈岩鄭先生墓貞敬夫人崔氏祔左)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배례석과 망주석이 2기 자리하고 있다. 이 곳 흑석골 정호(鄭澔)의 무덤자리는 나라에서 하사한 묘지라고 한다. 

 

 

 

정호(鄭澔)는  1648(인조 26)~1736(영조 12)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정철(鄭澈)의 현손이며, 할아버지는 정직(鄭溭)이고, 아버지는 감찰 정경연(鄭慶演)이다. 어머니는 민광환(閔光煥)의 딸이다. 일찍이 학문이 성숙하였고 송시열의 문하에서도 매우 촉망받았으나, 1675년(숙종 1) 송시열이 사화를 만나 귀양가게 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에 힘썼다. 그뒤 여러 형제의권유로 1682년(숙종 8) 태학에 들어가고 생원이 되었다.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이 되자, 오도일(吳道㊀)이 붕당을 키우고 권세를 부린다고 탄핵하였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송시열이 사사당하자, 그는 파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가 경성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풀려나 지평·수찬·교리 등을 역임하고, 1696년 이사상(李師尙)을 논핵하는 등 과격한 발언으로 파직되었다. 1702년 승지·부제학을 거쳐 1704년 함경도관찰사에 이어 1710년 대사간·대사헌을 지냈다. 1713년 대사성에 재임용되어 송시열의 묘정배향을 건의하였다. 1715년에는 부제학으로서 유계(兪棨)의 유저(遺著)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썼다. 그 내용에 소론인 윤증(尹拯)이 송시열을 배반했다는 내용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노론이 승리함으로써 대사헌이 되었다.1717년 세자(후의 경종)의 대리청정에서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시행하도록 했고, 예조판서를 거쳐 다음 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1721년(경종 1)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으로『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와 우의정에 승진되어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4대신의 신원(伸寃)을 누차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29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영중추부사로 죽었다. 평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늘 가난하게 지냈다 한다. 수암 권상하와 직제 이기홍과 가까이 지냈고 일찍이 우암이 편모하던 『문의통고(文義通攷)』를 수암과 같이 완성하였다. 시문과 글씨에 모두 솜씨가 있었다. . 저서로 장암집 26권이 전해지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묘소는 불정면 지장리에 있다.【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 청주박물관에 있는 정호선생의 초상이다]

 

 

장암 정호는 충주 중앙탑면 창동리에 위치한 누암서원(樓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누암서원은 1695년(숙종 2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시열(宋時烈)·민정중(閔鼎重) 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가금면의 누암리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으며, 그 뒤 권상하(權尙夏)·정호(鄭澔)를 추가 배향하였다. 1702년에 ‘누암(樓巖)’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하였다. 1724년(경조 4) 사액이 취소되었다가 1725년(영조 1) 회복되기도 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건물만 보전되어왔다. 그 뒤 사우(祠宇)가 퇴락하고 송시열․권상하․민정중의 영정을 분실하게되자, 1935년 정호의 후손들에 의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정호의 위패만을 다시 봉안하게 되었다.

 

 

 

 

 

 

 

 

 

 

 

 

장암은 1690(숙종 16)에 대간의 탄핵으로 사판에서 삭거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평소 산수를 좋아한 장암은 이 일을 겪은 뒤로 세상에 뜻을 버리고 입산(入山)할 생각을 하였는데, 마침 괴산 연풍의 장암에 반계정(攀桂亭)’을 짓고 그곳에 우거하였다. 반계정은 주자의초은사(招隱詞)에 나오는 계수나무 가지 부여잡고서 오래 머무노라(攀援桂枝聊淹留)”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다. 반계정을 얻게 된 경위가 다음의 글에 보인다.

 

재주 없는 나는 세도에 잠깐 쓰였다가 과연 낭패를 당하여 늦게야 비로소 후회하고는 (속세 일을) 접고 돌아와서 풍진 밖에 살려고 하였네. 시내와 산을 물어보다가 깊고 그윽한 연풍 서쪽에 있는 장암이라 불리는 곳을 얻었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며, 수석이 맑고 밝아서 나물 캐고 낚시할 만하였네. 그윽하고도 묘하여 바로 내 바람에 들어맞기에 여생을 마치기로 맹세하였네.

 

당시 원근의 선비들이 장암의 풍모를 듣고 와서 배우는 자들이 많았다. 장암은 그들과 날마다 경사에 대해 토론하고 비록 거친 밥도 잇지 못할 만큼 가난하였지만 근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암의 반계정이 완성된 직후 수암 권상하는 고인이 뜻밖에도 은거할 계획 가지니, 이 세상에 도리어 은자를 보겠네. 넝쿨 길 밖에 천향 풍겨 보내지 말고, 백운 속에 맑고 고운 기상을 잘 간직하소.”라고 하면서 계수나무가 지닌 맑고 고운 기상을 반계정에서 잘 간직하라는 당부의 뜻이 담긴 시를 지어 보냈다고 한다.

 

 

[장암 정호가 말년을 보냈던 연풍에 소재한  반계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