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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금면문경공장암정호사당(可金面文敬公丈巖鄭澔祠堂)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가금면문경공장암정호사당(可金面文敬公丈巖鄭澔祠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8. 24. 11:09

 

 

[국립청주박물관에 있는 정호의 초상화이다]

 

조선 후기에 장암 정호(鄭澔, 1648~1736)라는 분이 있다. 그는 수암 권상하와 함께 김장생, 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로 노론의 선봉에 서서 활발한 정치적인 활동을 한 정치가였다.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이다. 장암의 고조는 그 이름도 유명한 송강 정철이다. 부친인 정경연(鄭慶演, 1604~1666)은 천거로 영릉참봉에 임명된 후 사헌부감찰, 청안현감, 평릉도찰방 등을 역임하였는데 청렴결백하고 성실하다는 평을 들었다. 1665(현종 6) 평릉도찰방의 임기가 끝나자 벼슬을 그만두고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충주 노은면으로 내려와서 여생을 보냈다.

 

장암은 어린 시절을 충주에서 보냈다. 어릴 때부터 기질이 남달라 단정하고 정숙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20세를 전후해서 입신양명하기를 바라는 모친의 뜻에 따라 시문(時文)에 힘을 쏟는 한편 우암의 문하를 왕래하며 질의문학(質疑問學)하였다. 41세에 장암이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에 물러나 있을 때 우암은 장암에게 책을 보내며 지금 세상 사람들은 과거에 급제하고 나면 할 일이 다 끝난 것으로 여겨, 그만 서책과는 멀어져서 일생을 그르치고 마니, 두렵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글 읽기를 권면하기도 하였다. 우암이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타계하자 경성에서 복을 입고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였다. 그때 지은 1,471자에 달하는 장문의 제문은 스승에 대한 장암의 비통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장암은 자신의 논리에 반하는 반대당에 맞서 온몸으로 싸웠으며 화복(禍福)으로 인해 동요되거나 진퇴(進退) 때문에 태도를 바꾼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의를 밝히고 종사를 위해서는 하지 못할 말이 없었다. 한마디로 그의 성격과 사람됨은 강직(剛直)’그 자체였다. 그는 강직한 성격으로 언제나 반대당의 표적이 되었고 늘 언쟁의 중심에 섰다. 그는 타고난 싸움꾼이었다.

 

동문수학한 수암 권상하가 시사에 침묵하며 은둔한 학자라면 장암은 반대로 시사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한 정치가였다. 장암은 평생을 은둔하며 학문에만 몰두한 권상하에게 현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여러 번 권유하였다. 그러나 수암은 시사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같은 우암의 문하에서 처세관이 현저히 달랐음에도 장암과 수암 두 사람의 친분과 교분은 지속되었다.

 

장암의 강직한 성격은 벼슬살이를 한 곳에 오래 하지 못하게 하였다. 벼슬에 제수되었다가 곧 파직 혹은 좌천되거나 외직으로 나가기를 거듭하게 하였다. 그 이력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高陽 편배(1687, 40) 石城 현감(1688, 41) 鏡城 판관(1689, 42) 義城 현령(1696, 49) 東萊 부사(1700, 53) 淸風 徒配(1706, 59) 甲山 정배(1710, 63) 平昌 이배(1711, 64) 京畿 監司(1714, 67) 理山 찬축(1722, 75) 康津 薪智島 안치(1722, 75) 榮川郡 유배(1728, 81)

 

그는 전 생애에 걸쳐 기사환국, 갑술옥사, 신임사화 등의 역사적 사건을 두루 경험하고 좌천과 유배를 거듭하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오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조선왕조실록<영조 12년 병진>조에는 장암 정호의 졸기(卒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영부사 정호(鄭澔)가 졸()하였다. 임금이 하유하기를, “선조(先朝) 때 기사(耆社)에 동참했던 사람이 홀로 장수(長壽)를 누렸었는데, 지금 졸서했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슬프기 그지없다. 예장(禮葬)을 내리고 3년 동안 녹봉(祿俸)을 줄 것이며, 그의 아들 정희하(鄭羲河)는 복제(服制)가 끝나기를 기다려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호는 문청공(文淸公) 정철(鄭澈)의 후손인데,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몸가짐이 강직하고 방정하였는데, 언론이 과격하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조정에서 편안히 있을 수가 없었다. 지위가 삼사(三事)에 이르렀으나, 집에서는 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 고장에 살면서 청신(淸愼)하다는 것으로 이름이 났었다.

 

  [수회리 마을회관앞에 있는 정호의 아들 정희하의 선정비이다]

 

한때 영의정에까지 오른 사람의 집에 죽으로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였다는 것은 장암의 청렴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장암 정호의 시를 몇 편 소개해 본다. 다음의 시는 장암이 1687년 고양(高陽)에 편배되었을 때에 우암 선생이 보내온 시에 차운한 것이다.

 

창랑의 한 곡조 어옹에게 부끄러우니

절로 취한 것이지 세망(世網)이 공교로워서가 아닙니다.

사문을 욕되게 한 죄 진중하게 가르치시니

행장은 모름지기 옛 현인과 같아야 하지요.

滄浪一曲媿漁翁, 自取非緣世網工.

誤辱師門珍重誨, 行藏要與昔賢同.編配高陽, 尤菴先生寄示一絶, 敬次原韻.

 

기구는 굴원의漁父辭의 내용을 가져다 쓴 것이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는 것이 옳은 처세관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굴원이 삼려대부에서 쫒겨났듯이 고양으로 편배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지 세상탓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암이 보낸 원시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저돌적이고 직설적인 장암의 행동과 언사를 넌지시 질책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결구에서는 스승의 이러한 훈계를 받고 출처행장(出處行藏)을 현인처럼 하겠노라는 장암의 다짐이 드러나 있다.

 

다음은 75세의 고령에 강진의 신지도(薪智島)에 안치되었을 때의 시다.

 

남북 삼천리 길

타향에도 꽃은 피었구나.

꽃을 보고 술잔을 대하니

하필 내 집에 있을 것 있나?

南北三千路, 他鄕亦有花.

對花仍對酒, 何必在吾家. 智島棘中, 敬次尤菴先生絶句韻.

 

유배지에 봄이 오자 꽃이 피고, 꽃을 보고 술잔을 대하는 시인의 모습은 이전과 변함이 없다. 머나먼 유배지에서 만나는 봄이기에 상실감과 우수와 비애가 있을 법하지만, 시인은 봄을 맞고 있는 이곳이 고향이라고 말하는 초탈함을 드러내고 있다

  

장암은 1690(숙종 16)에 대간의 탄핵으로 사판에서 삭거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평소 산수를 좋아한 장암은 이 일을 겪은 뒤로 세상에 뜻을 버리고 입산(入山)할 생각을 하였는데, 마침 괴산 연풍의 장암에 반계정(攀桂亭)’을 짓고 그곳에 우거하였다. 반계정은 주자의초은사(招隱詞)에 나오는 계수나무 가지 부여잡고서 오래 머무노라(攀援桂枝聊淹留)”에서 그 뜻을 취한 것이다. 반계정을 얻게 된 경위가 다음의 글에 보인다.

 

재주 없는 나는 세도에 잠깐 쓰였다가 과연 낭패를 당하여 늦게야 비로소 후회하고는 (속세 일을) 접고 돌아와서 풍진 밖에 살려고 하였네. 시내와 산을 물어보다가 깊고 그윽한 연풍 서쪽에 있는 장암이라 불리는 곳을 얻었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으며, 수석이 맑고 밝아서 나물 캐고 낚시할 만하였네. 그윽하고도 묘하여 바로 내 바람에 들어맞기에 여생을 마치기로 맹세하였네.

 

당시 원근의 선비들이 장암의 풍모를 듣고 와서 배우는 자들이 많았다. 장암은 그들과 날마다 경사에 대해 토론하고 비록 거친 밥도 잇지 못할 만큼 가난하였지만 근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암의 반계정이 완성된 직후 수암 권상하는 고인이 뜻밖에도 은거할 계획 가지니, 이 세상에 도리어 은자를 보겠네. 넝쿨 길 밖에 천향 풍겨 보내지 말고, 백운 속에 맑고 고운 기상을 잘 간직하소.”라고 하면서 계수나무가 지닌 맑고 고운 기상을 반계정에서 잘 간직하라는 당부의 뜻이 담긴 시를 지어 보냈다.

 

 [연풍면에 있는 반계정이다 정호가 말년을 보내던 곳이다]

 

 

다음의 시는 장암이 반계정에 쓴 것이다.

 

      바위에 기대고 돌을 시렁삼아 새 정자를 지으니

동북으로 평평히 십리 물가에 임해 있네.

고개 넘어 자는 구름은 반벽에 머물러 있고

수풀 너머 찬 달은 빈 창을 비추네.

금단의 약속 있어 연단할 만하고

물색은 시기하지 않아 눈길이 문득 정답구나.

절로 우스워라. 임금 그리는 정성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난간에 기대어 북두성을 가리키네.

倚巖架石起新亭, 東北平臨十里汀.

過嶺宿雲留半壁, 隔林寒月透虛櫺.

金丹有約形堪鍊, 物色無猜眼却靑.

自笑戀君誠未已, 凭欄猶指北辰星. 秋夜, 登新成亭子, 書懷.

 

시제에서 드러나듯 새로 지은 반계정에 올라서 가을밤의 회포를 쓴 것이다. 수련(首聯)과 경련(頸聯)에서는 바윗가에 기댄 정자가 동북쪽으로 평평한 물가에 연해 있고, 구름이 보이고 달빛이 창에 비치는 아름다운 산수의 정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고 읊었다. 함련(頷聯)에서 시인은 그윽한 곳에 있으니 불로장생의 묘약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눈에 닿는 물색이 정답기 그지없으니, 매우 만족해하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미련(尾聯)연군(戀君)’북극성(北辰星)’의 시어를 통해 흡족한 시인의 마음 한 켠에 세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을 잊고자 들어온 장암이지만 여전히 임금과 조정과 나라에 대한 고민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 장암의 생활은 온전한 귀거래가 될 수 없었다. 벼슬에 제수되었다가 소척을 받으면 이곳에 내려오기를 몇 차례 반복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은 거칠고 때로 과격하기까지 한 현실 생활에서 벗어나 풍류와 한담이 넘치는 시정(詩情)을 쏟아내게 하였다

 

다음의 시들을 살펴보자.

 

그윽한 집 쓸쓸히 사립문도 열지 않으니

이 산속에 속객이 드물기 때문이지.

흥에 겨워 지팡이 들고 이따금 계곡을 나섰다가

평평한 들판에 한가로이 석양빛 띠고 돌아오네.

幽居寂寂不開扉, 爲是山中俗客稀.

興來曳杖時出谷, 平郊閑帶夕陽歸.幽事

 

섬돌 주위로 국화꽃이 활짝 피어서

꽃을 대해 두세 잔 거푸 마셨네.

밤 이슥토록 여흥이 끝나지 않아

휘엉청 밝은 가을 달에 일어나 서성이네.

繞砌黃花滿意開, 對花連倒兩三杯.

餘興夜深猶未已, 滿天霜月起徘徊. 與童兒對菊呼韻

 

예쁜 산꽃이 사랑스러워

한가히 읊조리며 천천히 골짝을 나섰네.

그대 만나 시냇가 돌에 앉아 있자니

어느덧 나무 그늘이 옮겨 가네.

爲愛山花好, 閑吟出洞遲.

逢君坐溪石, 不覺樹陰移. 歸樓江路, 遇李生, 書贈.

 

첫 번째 시를 보자. 깊은 산속에 자리 잡은 그윽한 곳에 찾아오는 속객이 드무니 사립문은 늘 닫혀 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주인은 흥이 일면 지팡이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색을 감상한다. 그리고 석양빛을 띠고 집으로 돌아온다. 거리낄 것 없는 혼자만의 여유와 한가로운 정취가 드러나 있다.

 

두 번째 시에는 가을 국화를 마주하고 술잔을 든 시인의 넉넉한 흥취를 읽을 수 있다. 밤이 깊어도 여흥이 사라지지 않아 달빛 아래 서성이는 시인의 모습은 언쟁의 중심에 선 논객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세 번째 시를 보자. 예쁜 산꽃을 보며 한취를 즐기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생을 만나서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표현에서 소박한 이웃의 한 사람으로 안주하고 있는 시인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위의 시편들은 격정적이지 않은 담담하고 맑은 흥취가 드러나 있다. 시어에 구애받지 않고 쉽게 써내려간 듯 애써 꾸민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꾸미지 않은 듯, 조탁하지 않은 듯 자연스러우면서 소박한 풍격이 느껴진다. 정객(政客)의 시라기에는 지나치게 말랑말랑하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장암의 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다.

 

정치가, 정치가는 모름지기 어떤 소양을 갖추어야 하는가? 자신의 논지를 굽히지 않는 강직함, 과단성 있는 언술, 순정한 의리(義理), 청빈함. 장암 정호가 지녔던 이러한 면들은 오늘의 정치가에게도 요구되는 덕목으로 여겨진다. 거기에 시인의 품성이 있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인가. 전통적인 인문학 사유를 말하는 문사철(文史哲)’이란 말이 있다. 문학과 사학과 철학을 두루 겸비하였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의 정치인들은 장암처럼 누구나 문인이요, 역사가요, 사상가였다. 역사에 오명을 남긴 이들도 기본적인 지적 소양을 갖추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시대는 달라졌어도 이러한 기본과 지적 소양을 갖춘 정치인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 우리시 308권. 2014. 2월호)

 

 

 

 

 

 

 

조선 숙종 21년(1695)에 창건되어 숙종 28년(1702)에 사액을 받은 서원으로 고종 8년(1871)에 서원훼철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1952년부터 정호의 후손(연일 정씨 문중)에 의하여 송시열(宋時烈), 민정중(閔鼎重), 권상하(權尙夏), 정호(鄭澔)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지내고 있다.본래는 누암서원 건물 중 일부 재료를 현 소재지인 창동으로 옮겨와서 후손들에 의하여 장암 정호를 모시는 건물로 만들었는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반칸의 전퇴를 두어 우측칸에는 사분합 띠살 들어열개문으로, 좌측 2칸에는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구조는 자연석으로 축조한 낮은 기단 위에 네모뿔형 화강석 기둥받침돌을 놓고 앞면에는 원형기둥, 뒷면에는 네모기둥을 혼합하여 세웠는데 기둥 윗부분에는 공포를 생략하고 주두와 양봉만을 이었으며, 창방으로 이어진 주칸에는 4구의 소로가 놓여 주심도리 장혀를 받쳐주고 있다. 가구는 전방 퇴주와 후방 평주 사이에 내 고주를 세워 대들보와 퇴량을 이어 그 위에 종량을 설치하였는데 종량 상부에는 우물 천정을 만들고 사다리꼴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쳐주도록 한 5량집으로 홋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주위에는 충주의 유명한 술인 청명주 공장과 창동 마애불과 오층석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