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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읍 초정리 초정온천 조형물(內秀邑 椒井里 椒井溫泉造形物)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내수읍 초정리 초정온천 조형물(內秀邑 椒井里 椒井溫泉造形物)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3. 23. 08:29


초정(椒井)-산초나무 우물이란다. 이름에서도 알수있 듯 산초나무향 같이 똑 쏘는 물이라는 뜻이다.


청주에서 새로난길을 따라 초정리로 접어들면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조형물입니다.

초정온천수는 미국의 샤스터 그리고 영국의 나포리나스와 함께 세계의 3대 광천수로 손꼽히고 있다.

초정리 온천수의 역사는 약 6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똑 쏘는 맛이 일품인 광천수는 지역민들을 위하여 음용할수있는 곳이 마련되여 있다.


안질로 고생을 했던 조선조의 세종이 이 곳 초정리에서 마련된 행궁에서  123일간 눈병인 안질을  치료한 이름있는 곳이다.

초정리를 중심으로 그 시절 세종을 알현하기 위해 주위 벼슬아치들이 묵었던 곳등 여러상황들을 지명등을 통해 알수있다.



초정리 광천수를 나타내는 여러가지 조형물이 있다.



세종실록126권, 세종 31년 12월 3일 기유년 편을 살펴보면

-임금이 하연·황보인·박종우·정분·정갑손에게 이르기를,

"나의 안질(眼疾)은 이미 나았고, 말이 잘 나오지 않던 것도 조금 가벼워졌으며, 오른쪽 다리의 병도 차도가 있음은 경 등이 아는 바이지만, 근자에는 왼쪽 다리마저 아파져서, 기거(起居)할 때면 반드시 사람이 곁부축하여야 하고,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있어도 반드시 놀라고 두려워서 마음이 몹시 두근거리노라. 예전에 공정왕(恭靖王)께서 광주(廣州) 기생의 이름을 생각하여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사람을 시켜 치문(馳問)하게 한 뒤에야 심중이 시원하신 듯하였고, 또 연회 때에 신색이 이상하시더니, 얼마간 있다가야 안정하시고는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마침 생각하는 것이 있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얼굴빛이 변함이 이르렀노라.’ 하셨다. 그때에 내 매우 이상하게 여겼더니, 이제 왼쪽 다리가 아픔에 때로 이를 생각하니, 기운이 핍진(乏盡)함을 깨닫지 못하다가, 오래 되어서야 평상으로 회복되고는 하니, 예전에 괴이하던 일이 내 몸에 이르렀노라. 박연(朴堧)·하위지(河緯地)가 온천에서 목욕하고 바로 차도가 있었지만, 경들도 목욕하고서 병을 떠나게 함이 있었는가. 나도 또한 온천에 목욕하고자 하노라."

하니, 황보인·박종우·정갑손이 대답하기를,

"신 등도 일찍이 배천 온천(白川溫泉)에 가서 목욕하여 병을 고쳤습니다."

하였다. 이에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 강맹경(姜孟卿)배천 온천에 보내고, 인하여 명하기를,

"그전에 이천(伊川)으로 거둥했을 때 폐단이 많았음은 말할 수 없다. 온양(溫陽)초수 행궁(椒水行宮)에서도 너무 지나쳤으나, 모두 이엉[茨]을 덮었을 따름이니, 너는 배천으로 가되 폐단이 나지 말게 하라. 그렇다고 내가 거처할 곳이 너무 좁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 또 병조 판서 민신(閔伸)으로 지응사(支應使)를 삼고,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동궁(東宮)은 내 노환[老疾]때문에 멀리 떠날수 없으므로, 강무(講武)를 행할 수 없겠다. 이번 배천(白川)의 행차에는 개성(開城) 등지의 길을 경과하게 되니, 새짐승을 번육(繁育)시켜 연도(沿途)에서 사냥을 함이 어떻겠느냐. 그러나, 또한 이 때문에 군졸을 더함은 불가하니, 다만 호위하는 군사로써 이를 할 것이다."

하니, 좌승지 조서안(趙瑞安) 등이 대답하기를,

"이 기회에 강무(講武)하는 것이 편하겠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126권 7장 B면【국편영인본】 5책 152면      

                                            




1444년에 지어진 세종대왕의 초수리(초정약수) 행궁이 와가(기와집)가 아닌, 초가였다는 사실이 본보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그동안 지역 학계도 몰랐던 이같은 사실은 세종실록 31년 12월3일자의 "온양(溫陽)과 초수 행궁(椒水行宮)에서도 너무 지나쳤으나, 모두 이엉[茨]을 덮었을 따름이니"(溫陽 椒水行宮 亦爲大過 然皆蓋茨耳)라는 문장을 통해 확인됐다. 이 문장은 세종대왕이 초정약수를 방문한지 6년이 지난 1449년(세종 31) 황해도 배천 온천으로 거둥하기 직전에 대신들에게 말한 것으로 돼 있다. 원문 '溫陽 椒水行宮' 문장은 일견 '온양의 초수행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뒤에 '모두 이엉을 덮었을 따름이니'(然皆蓋茨耳)라는 복수 표현이 온 것을 감안하면 별개의 2개 행궁, 즉 온양행궁과 초정약수 행궁을 모두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또 지명 온양은 따스한 온천수가 나오기 때문에 지어진 것으로, 차고 톡 쏘는 용출수에 붙이는 초수(椒水)와는 분명히 구분되고 있다. 이것이 아니더라도 세종실록을 보면 당시 조정은 세종대왕의 초정약수 행궁은 한 달만에 지은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그것도 겨울이 한참이던 엄동설한에 초가가 아닌 와가를 건립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충북일보]



세종이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이 곳 초정온천을 찾은것을 기념하기위해 조형물에도 잘 표현하여 놓았다.







초정리를 대표하는 초정리조형물 건너편으로 한글공원이라 하여 많은 탐방객들과 지역주민들의 쉼터공원이 있다.

이 한글공원에도 초정약수인 약수를 음용할수 있도록 음수대를 비치하여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