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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 碑의 교훈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5. 25. 21:05

[조유전의 문화재 다시보기] <35> 삼전도 碑의 교훈

한국일보 | 입력 2010.05.25 20:53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 근린공원에 서 있던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석촌호수 서호 언덕으로 옮겨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홀로 비만 서있던 것을 옮기면서 현대식 보호각을 짓고 인위적인 훼손을 막기 위해 감시카메라까지 설치해 대접을 한 셈이다. 삼전도비의 정식명칭은 三田渡淸太宗功德碑(삼전도청태종공덕비)이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인 1639년 인조임금이 남한산성에 45일간 항쟁하다 결국 청나라 군대의 본영이 있던 삼전도로 나와 항복한 뒤 세운 청 태종 공덕비이다.

이 비가 최초로 세워졌던 곳은 지금의 송파구 삼전도나루 근처였겠지만 세월이 흘러 오늘에 이르는 동안 우여곡절을 겪어왔다. 청일전쟁 때인 1895년에는 고종이 땅에 묻게 했고 알제강점기 때 일제가 다시 세웠다. 광복 후에는 주민들이 자신들의 생활근거지에 치욕의 비가 서 있다는 것을 참지 못해 다시 묻었는데 1963년 한강 홍수로 또다시 발견되어 석촌동 289-3번지에 세워졌다. 그 후 지난 2007년 3월 붉은 페인트로 비 앞 뒷면에 "철 370" "거 병자"라는 글자를 비의 절반에 차게 써서 훼손 한 사건도 발생했다. 범인도 잡히고 보존처리를 통해 원상복구도 했다. 이러한 역사를 지닌 삼전도비가 지난 4월 25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371년 만에 제 자리에 가까운 곳으로 온 셈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비는 높이가 5.7m에 달하는 거대한 대리석비로 비록 조선을 침략한 청 태종의 송덕비이지만 만주어와 몽골어 그리고 중국어 즉 3개국 문자가 새겨져 있는 유례가 없는 비이다. 정부에서는 제작 연대가 확실하고 당시의 비 받침과 비 머리의 모습 등 학술적인 중요성을 인정해 1963년 사적 101호로 지정해 보존해 왔다.

강압에 의해 비를 마련할 당시 굴욕적인 비문을 쓰고자 하는 신하가 없어 결국 이조판서(지금의 행정안전부장관) 李景奭(이경석)이 글을 짓고 글씨는 당대의 명필로 알려진 吳竣(오준)이, 그리고 비 이름은 呂爾徵(여이징)이 썼다. 이 세 사람 가운데 글씨를 쓴 오준은 치욕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오른 손을 돌로 짓이겨 못 쓰게 만들고는 벼슬도 버린 채 다시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비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각종 건축 규제 등으로 주민들의 재산상의 피해가 생기다 보니 지역사회의 애물단지가 되어 80년대부터 민원의 대상이 되어왔고 결국 옮겼다.

그러나 삼전도비가 세워졌던 1963년 당시는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처음부터 문화재를 먼저 생각하고 개발했다면 옮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치욕의 역사든 영광의 역사든 문화유산을 통해 교훈을 삼아야 할 이유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이나 다음 세대에도 필요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민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미흡한 수준임을 증명해 주는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경기문화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