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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광면 대명리 이원배묘(文光面 大明里 李元培墓) 본문
문광면 대명리 둑시마을 성주이씨 선산에 자리하고 있는 이원배의 묘지이다.
이원배는 이문건의 손자이며 어려서는 할아버지 글 읽는 모습을 따라 하기도 하고, 할아버지가 외출하면 늦게까지 기다리는 등 할아버지를 매우 따른다. 이처럼 아버지 대신 할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나, 할아버지의 기대가 너무 큰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동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나 공부하기만을 강요하자 더욱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때마다 매를 맞거나 벌을 받기도 하였으나 고치려 하지 않고 13세 때부터 술을 좋아하여 연일 음주를 즐긴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하였으나, 이문건이 세상을 떠난 후 어른이 된 이숙길은 사대부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양아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나중에 이숙길은 장성하여 임진왜란 때 우정침(禹廷琛), 윤우(尹佑)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나중에 공로를 인정하여 나라에서 포상을 하려 하였으나 사양하여 뭇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한다.
참고로, 이숙길은 1564년에 이수봉으로 이름은 바꾼다. 그런데 괴산군 읍지(槐山郡 邑誌)에 수록된 기록에 따르면 이원배(李元培)로 나타나, 또 한 번 이름을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숙길, 이수봉, 이원배는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양아록(養兒錄)(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고전, 2013. 11., 인문과교양)
묘지앞에 비석에는 봉직랑수사재감첨정성주이공휘원배지묘(奉直郞守司宰監僉正星州李公諱元培之墓)라고 적혀있다.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은 사재감(司宰監)의 종4품 관원이다.
용례로는 흥양군 신운에게 정헌대부를 더하여 주고, 죽산군 박지번에게 가정대부를 더하여 주고, 권찬을 현복군으로, 성률을 공조 참의로, 신자승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이배륜을 사섬 부정으로, 한한을 사재감 첨정으로, 최세현을 형조 좌랑으로, 윤보를 종부사 주부로 삼았는데, 이날은 대내에서 특별히 제수된 자가 많았다. ; 加興陽君申雲正憲大夫 竹山君朴之蕃嘉靖大夫 權攢爲玄福君 成慄工曹參議 申自繩成均館大司成 李培倫司贍副正 韓閒司宰監僉正 崔世賢刑曹佐郞 尹堡宗簿寺主簿 是日 自內特除者多 [예종실록 권제3, 26장 뒤쪽, 예종 원년 2월 13일(무술)]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사재감(司宰監)은 문종 때 사재감으로 관제를 정해 판사(判事, 정3품)·경(卿, 종3품) 1인, 소경(少卿, 종4품) 1인, 승(丞, 종6품) 2인, 주부(注簿, 종7품) 2인을 두었다. 1298년(충렬왕 24)에 사진감(司津監)으로 고쳐 판사를 없애고 경을 감(監)으로, 소경을 소감(少監)으로 고쳤다가 다시 사재시(司宰寺)로 개칭하였다. 1308 (충렬왕 34) 다시 도진사(都津司)로 개정해 영(令, 정3품) 3인, 장(長, 정4품) 3인, 승(정5품) 2인, 주부(정7품) 2인을 두었다. 뒤에 사재시로 고쳐 판사(정3품)·영(종3품)·부령(종4품)·승(종6품)·주부(종7품)를 두었다. 1356년(공민왕 5)에 사재감으로, 1362년에 사재시로, 1369년에 사재감으로, 1372년에 사재시로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다.
조선 건국 뒤 1392년(태조 즉위년) 7월에 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사재감을 설치, 어량·산택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직제로 판사(判事, 정3품) 2인, 감(監, 종3품) 2인, 소감(少監, 종4품) 2인, 승(丞, 종5품) 1인, 겸승(兼丞, 종5품) 1인, 주부(主簿, 종6품) 2인, 겸주부(兼主簿, 종6품) 1인, 직장(直長, 종7품) 1인을 두었다.
1414년(태종 14) 1월 감을 정(正)으로, 소감을 부정(副正)으로 개칭하고, 이듬해 1월에는 부정 1인을 감원하였다. 1419년 12월에 다시 1인을 늘이고, 1423년(세종 1) 주부 1인을 감원하였다. 1460년(세조 6) 다시 부정 1인, 직장 1인을 감원하고, 1466년에 참봉(參奉, 종9품) 1인을 감원해 이것이 『경국대전』에 성문화되었다.
『경국대전』에는 어물(魚物)·육류(肉類)·식염(食塩)·소목(燒木)·거화(炬火) 등을 맡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조(提調, 종2품) 1인, 정(정3품) 1인, 부정(종3품) 1인, 첨정(僉正, 종4품) 1인, 주부(종6품) 1인, 직장(종7품) 1인, 참봉(종9품) 1인 등을 두었다. 뒤에『속대전』에서는 정·부정·참봉을 감원하고 봉사(奉事) 1인을 증원했다가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사재감[司宰監]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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