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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물면 오성리 토산현감 임가재묘소(甘勿面 五城里 兎山縣監 林可材墓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감물면 오성리 토산현감 임가재묘소(甘勿面 五城里 兎山縣監 林可材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4. 8. 08:07

 

 

 

감물면 오성리 모촌에 위치하고 있는 부안인 임가재의 무덤입니다, 무덤앞에는 임가재와 관련된 침탄정 유적비와 효행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선조 현종때 정려되였던 임가재의 정려문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멸실 되였습니다.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임가재는 1670년 승정원일기 11책 (탈초본 220책) 현종 11년 6월 17일에 의하면  吏曹, 口傳政事, 以金壽增爲朔寧郡守, 林可材爲兔山縣監, 以李之經爲抱川縣監。라고 기술되여 있으며 토산현감에 제수됨였음을 알수있다.

 

 

 

 

 

 

임가재에 대하여 자세한 이력등은 알수가 없지만 괴산군지와 괴산군삼강록에 의하면 임가재의 부모에 대한 효행을 기록한 대목이 있습니다. 임가재(林可材)는 본관은 부안(扶安)으로 보은 현감을 지낸 임유침(林有琛)의 5세손이다. 벼슬은 토산현감(兎山縣監)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늙은 아버지와 함께 피난하였는데 피난처에 오랑캐군사가 들어왔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는 걷지 조차 못하는 상황이어서 황급히 아버지를 업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숲 속에 숨어 화를 면하였다. 현종조에 정려되었고, 묘소는 감물면 오성리 모촌에 있다. 라고 기술 되여있습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의 임가재(林可材)에 대한 대목을 살펴보면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집의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토산 현감(免山縣監) 임가재(林可材)는 임소에 도착한 이후 오로지 탐오를 일삼고 경내에 굶어 죽은 시체가 많은데도 진휼하여 살릴 줄을 모릅니다. 관속(官屬)의 이름을 빌려 꾸어주는 쌀을 많이 내어 관아 안으로 들였다가 비싼 때를 타서 팔기 때문에 관아에 시장처럼 사람이 모입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고 전해진다.".[현종실록 19권, 현종 12년 7월 23일 임신 1번째기사 1671년 청 강희(康熙) 10년]  

 

  。" 上特命拿問定罪。 又啓曰: "兎山縣監林可材專事貪黷, 民皆怨詈。 借名官屬, 多出糶穀, 乘貴販貨, 飯門如市。 請拿問定罪。" 上從之。

 

1670년 토산현감으로 제수되였으나 여러 실정등으로 인하여 1671년에 나문(拿問) 당하였음을 알수 있다.                   

 

 

 

 

부안인 임가재의 묘소는 상석과 묘비 그리고 망주석 2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무덤은 북향으로 규모는 그리 큰편은 아니며 부인인 평산신씨(平山申氏)와 합장묘입니다.평산신씨는 정언(정언) 효의 딸이다.

 

묘비는 210(130)×50×24㎝ 크기로 宋毅燮이 짓고 8세손 盛喆이 썼는데조봉대부행토산현감임공휘가재지묘(朝奉大夫行兎山縣監林公諱可材之墓)’라고 쓰여 있다.무덤은 후손들에 의하여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토산현감(兎山縣監)을 지낸 임가재(林可材)의 묘소 위로 같은 부안인인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낸 임가재의 부친인 임권(林權)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무덤은 북향으로 부인 의인 옥구장씨와 합장묘이며 규모는 큰편이 아니며 상석과 망주석 그리고 묘비를 갖추고 있다.

 

[조선환여승람] 명묘에는 "임권은 부안인으로 유침의 현손이다" 호조좌랑을 지냈다.

부인은 옥구장씨로 판관 홍선의 딸이다. 묘소는 감물면 점장리 오좌에 합봉이다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