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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면 문방리 신경행운수정유허비(淸安面 文芳里 辛景行雲水亭遺墟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청안면 문방리 신경행운수정유허비(淸安面 文芳里 辛景行雲水亭遺墟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4. 9. 07:19


유허비라 함은 이칭으로 유지비(), 구기비() 라고도 불리운다.선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를 칭한다.


유허란 유지()·유적()·구기()와 같이 ‘남긴 터(자취)’·‘옛터’의 뜻으로, 여기에서는 선현들이 태어났거나 살았거나 임시 머물렀던 곳, 또는 순절()하거나 귀양살이하였던 곳을 가리킨다.

고려시대까지는 유허비라는 명칭의 비는 보이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유허비를 비롯하여 유지비()·구기비()라는 명칭의 비가 적지 않게 조성된다  - 유허비 [遺墟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비석에는 충익공신경행운수정유허비(忠翼公辛景行雲水亭遺墟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옆에는 구비(舊碑) 2기 자리하고 있다.



 신경행(辛景行) 1547(명종 2년)~1623(광해군 15) 자(字)는 백도(伯道), 호(號)는 조은(釣隱), 시호(諡號)는 충익(忠翼)이다. 본관은 영산(靈山)이다. 신경행(辛景行 1547~1623)은 1547년(명종 2) 7월 12일 자시(子時)에 괴산군(槐山郡) 청안면(淸安面) 문방리(文芳里)에서 아버지 신질(辛垤)과 어머니 영동(永同) 김씨(金氏)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고려조(高麗朝) 제11대 인종왕 때 금자광록대부 문화시랑 평장사(金紫光祿大夫 太傳門下侍郞 平章事)를 지낸 신경(辛鏡)의 17세(世) 손(孫)이며 덕제공파(德齊公:辛倜)의 9대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보통사람보다 뛰어났으며 씩씩하고 도량이 컸다. 본성(本性)이 어질고 글 읽기를 즐기었으며 일찍부터 남달리 글짓기를 잘 했다. 그 아버지는 부인 영동김씨에게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현달(顯達)할 것이요. 나는 이 아이가 현달함을 보지 못하겠지만 부인은 자식의 공양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지금의 충북 청원군 북이면 석화리에 사는 섬계(剡溪) 이잠(李潛 1528~1575)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스승의 아들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1553~1630)과 지금 청원군 내수읍 비상리에 살고 있는 백음(柏陰) 변경복(卞景福 1538~1629)과 절친했다. 그는 이잠 선생으로부터 이득윤ㆍ변경복과 함께 도학(道學)을 배우고 무예를 익혔는데 몸이 몹시 날렵하고 머리가 아주 영리하여 하나를 보고 배우면 열을 통달하므로 이잠선생이 깊은 총애했다. 마을의 할머니가 크고 높은 감나무에 달린 감을 아무도 따지를 못해서 까치의 밥이 될까 안타까워하는 것을 보고 그가 단숨에 올라가 감을 따서 주인에게 주자 마을 사람들은 그의 겨드랑에 날개가 달려서 날아다니는 장사라고 했다 한다. 석화리에 있는 이잠선생님댁에서 글공부를 하다가, 청안면 문방리 집에 와서 점심을 먹고 가면 아직도 선생님은 식사 중이어서 친구들로부터 축지법을 하는 신동으로 불려지기도 했다고 한다.
27세가 되던 1573년(선조 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해 5월 20일에 둘째 아들 할(劼)을 낳음으로 집안에 경사(慶事)가 겹쳤다. 31세가 되던 1577년(선조 10년) 9월 28일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무원정자(承文院正字)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592년(선조25년) 9월 10일 한산군수(漢山郡守)로 승진(陞進)되어 제수됐다. 선조가 김응남(金應南)에게 호서지방을 방비할 적임자를 추천할 것을 비변사(備邊司)에 하교했다. 김응남(金應南)이 답하기를 오직 우리는 왜놈침략 방비를 다해야 할뿐이오니, 괴산(槐山) ․ 남원(南原) ․ 옥천(沃川) 등지에 훌륭한 의병장을 보내어야 합니다. 신 경행(辛景行)은 청렴하고 활을 잘 쏘니 의병장으로 거두어 서용하여야 합니다.”라고, 선조에게 호서지방의 의병장으로 신경행을 적극 추천했다.
1596년 6월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인 도원수(都元師) 이원익(李元翼)은 신경행을 한산군수에서 다시 종사관(從事官)으로 전임하도록 했다. 7월 9일 그가 한산에 머물고 있는데 이몽학(李夢學)이 반역 무리들과 함께 난(亂)을 일으켜 홍산현(鴻山縣), 임천군(林川郡), 정산현(定山縣), 청양(靑陽), 대흥(大興)을 함락시키고 홍주성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는 홍주목사 홍가신과 더불어 이몽학난군을 섬멸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없애고 백성의 불안과 사회의 혼란을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큰 공적(功績)을 쌓았다. 1604년(선조37) 8월 12일에 장흥부사(長興府使)로 임명하게 된다. 그해 가을(1604 선조37년)에 조정에서는 그를 청난공신 3등으로 책봉(冊封)을 하고 영성군((靈城君)으로 봉(封)해지고, 분충출기청난공신(奮忠出氣淸難功臣)으로 봉해졌다. 이때 신경행의 초상화(肖像畵)을 그려 후세에 전하라명했다. 1607년(선조40년) 6월 16일에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됐다.
광해군은 즉위 2년 12월(1610년)에 신경행을 명나라에 사신(使臣) 관압사(管押使)로 임명하여 명나라에 갔다. 당시 조선국에서는 명(明)나라에 2년마다 많은 마필(馬匹)을 비롯하여 농공산물을 조공(朝貢)을 했다. 조공을 할 때마다 명나라 사인(舍人)들이 조공으로 바치는 말에 대하여 억지트집을 잡거나 아니면 반송(伴送)을 하는가 하면, 조선국 사신들에 대한 처우를 매우 불손 하게 하는 등, 명나라 사인(舍人)들의 작폐(作弊)가 심하여 감당 할 수 없었다. 그
는 이런 일들을 관리하는 명나라 제독(提督)에게 글을 올려 저들의 폐단을 모두 말했다. 그리고 명(明)나라 만력황제(萬曆皇帝)에게 상세하게 글을 올려 명나라 관리들이 조선국 관리들에게 금전을 가혹하게 요구하고 재물을 빼앗는 가렴주구(苛斂誅求) 폐단(弊端)을 세세히 모두아룄다. 이에 명나라 신종황제(皇帝)는 그의 용기와 비범함을 가상히 받아 들여 대궐로 불러들어 크게 상(賞)을 주고 칭찬하며 명나라 관리들에게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명을 내렸으
며 조공으로 바치던 필마를 중지하고 종전대로 곡물로 조공할 것을 명했다.
신경행(辛景行)은 1611년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인 청안으로 내려와, 지금 괴산군 청안면 문방 3리 월은동(月隱洞)에 운수정(雲水亭)을 지었으며, 청안면 좌구산에서 초평면으로흘러들어가는 반계(磻溪)주변으로 추정되는지역에 조은정(釣隱亭)을 지었다. 신경행의문집인『조은집(釣隱集)』에 실려있는『반
계증우시첩(磻溪贈遺詩帖)』 에,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이시발(李時發1569~1626), 이호민(李好閔 1553~1634),김치(金緻 1577~1625), 윤근수(尹根壽1537~1616), 이산해(李山海 1539~1609),이수광(李睟光 1563~1628)등과 주고 받은 시문이 실려있다. 신경행의 친구인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이 만사(輓詞)와 「제문(祭文)」를 지었다. 신경행은 고향주변에 사는 지금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에 사는 지인들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을때, 「조은정사음(釣隱亭謝飮)우순민(禹順民1530~ 1612)이 정규(廷珪 1559~?), 정침(廷琛 1564∼1632), 언옥(彦玉 ?~? ),이수경(李守慶)」이라는 시를 지어 사례했다. 송상현의 장남 송인급과 시를 주고 받았는데,송인급 후손집에는 남아있지 않고 신경행의 문집인『조은집(釣隱集)』실려있다. 조일전쟁 때 중국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온 주지번(朱之蕃)과 주고받은 시도 있다. 「차주지번운(次朱之蕃韻)」과 시를 주고받았다. 이렇듯 신경행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다.
청안면 문방리 군방서원(애연사)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증평군 증평읍 남차리에 있으며, 저서로 『조은집(釣隱集)』이 있다.
【참고문헌】『조은집(釣隱集)』『신경행청난공신교서(辛景行淸難功臣敎書)』







신경행인 쓴 조은집(釣隱集)에 쓰인 운수정기(雲水亭記)를 보면

월동(月洞:문방3리 월은동) 남쪽에 바위가 있는데 이름은 우지암(愚池巖)이라 한다.

우지암 아래 연무(延袤:땅의 넓이 또는 길이 연은 가로로서 동서를 뜻하며 무는 세로로서 남북을 뜻한다)가 130자나 되는 정자가 있다.

연못은 함담지라고 하는데 모두 휼룡하다. 정자는 운수정이라 이름을 했으니 그 경치를 취한것이다.

함담지 동서쪽으로 4개의 섬이 있는데 백구도 노화도 소반장도 소영주도 이다.

4개의 섬이름은 물(物)로 이름을 붙였고 3개의 섬은 상(像)을 가차해서 이름했다.


이 운수정의 뒤로는 성산(城山:성산리 큰말)이 있고 앞으로는 칠보산을 대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귀봉산(좌구산)을 바라보고 있고 북쪽으로는 송수산을 바라보았고 수묵 같이 어렴풋한 고모산이 멀리있다. 그리고 조련수(組練水)와 영환수(縈還水) 두물이 가까이 있다.[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