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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면 청용리 김질간묘갈(靑安面 靑龍里 金質幹墓碣)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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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안면 청용리 김질간묘갈(靑安面 靑龍里 金質幹墓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4. 20. 12:51


청안면 청용리 청용3리에 자리하고 있는 광산인 김질간의 묘갈입니다. 비석의 표면에 많은 박리현상이 있습니다.



김질간(金質幹)의 생몰년은  1564(명종 19)∼1621(광해군 13) 입니다.
조선 중기 문신으로 자는 문오(文吾), 호는 쌍매(雙梅), 본관은 광산(光山)입니다. 할아버지는 공조정랑을 지낸 김광우(金光佑)이며, 아버지는 성균관 박사를 지낸 김응구(金應龜)이고, 어머니는 노경기(盧景麒)의 딸 교하노씨(交河盧氏)입니다.


1588년(선조 21) 생원이 되고, 1601년(선조 3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 1602년 병조좌랑이 되고 1605년부터 외직으로 나가 제원찰방(濟原察訪)·대동찰방(大同察訪)·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전라도도사·창원판관·강진현감(康津縣監) 등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에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이듬해 『선조실록』의 기주관(記注官)이 되었다가 곧 사간원 헌납을 거쳐 1612년 병조정랑에 승진하였다. 이후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사헌부장령·사간원 사간등을 지내면서 대북정권(大北政權)의 정책 추진을 주도하였다. 1613년(광해군 6) 겸보덕이 되었으며 1614년 사헌부집의로 홍문록을 초록(抄錄)하였고, 1615년 홍문관 교리로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1617년 충청감사와 강원감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치 못하였다.



1618년 여러 차례 승지에 오르고 판결사를 지내다가, 1620년에는 승정원좌승지, 이듬해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가선대부에 올라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세조의 영정(影幀)을 영변(寧邊)에서 봉안하여 온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청안면 청룡리에 있다.


김질간의 묘지석은 표면이 많이 박리되여 있습니다.【참고문헌】 『광해군일기』 『괴산군지』 『괴산군 신도비·묘갈 번역집(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