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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성면갈산리추봉영당(琅城面 葛山里楸峰影堂) 본문

통합청주시/상당구(上黨區)

낭성면갈산리추봉영당(琅城面 葛山里楸峰影堂)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6. 5. 22:53

 

 

 

 

 

 

 

 

 

 

 

 

 

 

조선시대의 영당이다

1872년(고종9년)에 오저(吳著)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세웠다 

영당이라 함은

" 종파의 조사()나 절의 창시자, 또는 덕이 높은 중의 화상()을 모신 ."을 칭한다

 오저는 조선 후기의 문관.
[가계]
본관은 보성(寶城)이며, 자는 근보(謹甫), 호는 추봉(楸峰)이다.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 오도명(吳道明)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756년(영조 32)의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 정9품 벼슬)가 되고, 1762년 숭릉 별검(정8품 또는 종8품의 벼슬), 1764년 성균관 전적(성균관의 정6품 또는 종8품 벼슬)을 거쳐 이듬해 예조좌랑(정6품 벼슬)에 오르고, 1774년에 병조정랑(정5품 벼슬)이 되었으며, 사헌부 장령(정4품 벼슬)이 되어 돈령부의 잘못을 바로잡는 상소를 올렸다.

이듬해에는 지평(사헌부의 정5품 벼슬), 통례원의 우통례(정3품 벼슬)와 장령을 두루 역임하고 1776년 장령으로 대망 일을 맡았다가 이조판서 이중우(李重祐)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1776년 다시 성균관 사성(司成: 종3품 벼슬) 등을 역임하고, 1780년(정조 4)에 군자감정(軍資監正: 정3품 벼슬)을 거쳐 외직(外職)인 성환도찰방(각도의 역참에서 역마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종6품의 벼슬)을 지내다 사임하고,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갈산리에 귀향했다.

1783년 사간원의 정언(정6품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787년에는 장령으로 있으면서 기호지방(畿湖地方)의 목면 농사가 흉년이 들자 구휼할 것을 상소하여 시행토록 하기도 하였다.

1789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 당상관의 품계)에 오르고 공조참의(정3품 벼슬), 돈령도정(정3품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1790년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품계)에 오르고 한성부 좌윤(종2품)을 거쳐 1794년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품계)에 이르렀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중추부의 정2품 벼슬)로 기로소(耆老所: 나이가 70세 이상인 정2품 또는 종2품의 실직(實職)에 있는 문관 벼슬아치들을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에 들어갔으며, 그해 82세로 죽었다.

[묘소]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갈산리에 있으며, 1985년 영정각을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