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현도면 선동리 안승갑기적비(賢都面 鐥洞里 安承甲紀積碑) 본문

통합청주시/서원구(西原區)

현도면 선동리 안승갑기적비(賢都面 鐥洞里 安承甲紀積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5. 10. 06:16

 

현도복지회관옆에 자리하고 있는 안승갑의 기적비입니다.비석의 전면에는 약산안공승갑기적비(諾山安公承甲紀積碑)라고 적혀있으며 좌우후면에는 안승갑의 행적이 적혀있다.비의 건립시기는 1995년 5월 현도면민과 유지일동들이 낙산 안승갑을 그리며 비석을 세웠다.

 

 

 

여기 효행을 근본으로 살고 이순간이 일생이다. 이 순간을 참되고 복되게 살자는 좌우명과 몸소 세운 실천주의에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애도봉사(愛都奉仕)의 덕목을 실천한 선각자가 있으니 그가 곧 호가 낙산(諾山)인 순흥안문(順興安門) 승갑공(承甲公)이다.공은 고려명현 문성공(文成公)의 후손으로 1922년 5월 27일 충북 청원군 현도면 죽전리에서 성호(晟鎬)공과 보성오씨(寶城吳氏) 사이에 3남매중 장남으로 태여났다.

 

 

 

유년부터 총명이 남에 앞서 주위에 촉망을 한몸에 받으며 자라며 난관을 타계하려는 필성(必成)의 의지를 길렀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의 공은 남양군도(南洋群島)자바에서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조직 조선인민회 부회장 직책으로 항일중(抗日中)칠개월여(七個月餘)의 심한 옥고를 치르었으며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문서는 독립기념관(獨立記念館)에 보관되여 있다.

 

 

 

조국광복을 맞으매 향리에 돌아와 효친봉선(孝親奉先)의 지성을 다하는 한편 고장발견의 지름길은 지역민의 복지향상과 풍속순화에 있음을 공감하고 옥포천(玉浦川)에 다리가 없어 주민의 내왕과 학생들의 통학이 불편하매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당시 청와대 박지만군에게 이 사연을 전하게 하여 마침내 그 뜻을 이루니 오늘의 지만교(志晩橋)라는 명칭이 이에서 유래하였다. 공의 끝없는 향토애는 부실한 제방으로 이 곳 농로가 소량(小量)의 비와 한발에도 피해가 극심한 상황을 지나칠수 없었다. 이에 관련정치기와의 끈질긴 협상끝에 튼튼한 제방과 양수장을 설치 오늘의 문전옥답으로 바꾸어 놓았고 이 고장의 불편한 고통을 해소하고자 수차레 요로에 진정하여 그 뜻을 이루는 한편 면민의 숙원인 복지회관 건립에 자비 이백만원을 쾌척(快擲)하면서 솔선하여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자랑스런 복지회관을 이룩하였다. 

 

 

 

공은 이나리 장래는 오직 청소년에 좌우한다는 신념으로 일생동안 졸업식때마다 선행학생을 발굴 포상하며 명심보감을 부상으로 주어 수신에 진력하기를 당부하였다.생전시 400여쌍의 주레를 집레하면서 둥근거울을 주고 항시 원만한 생활과 자기 반성의 징표로 삼도록 하였다.

공의 그 큰뜻은 육영과 인술로 까지 승화했으니 중학교가 없는 이 고장에 박정희대통령에게 사신(私信)을 보내 오늘의 현도중학교가 설립되게 함으로서 주민의 경제적 시간적 부담을 덜었고 선고(先考)에게서 배운 한방지식(韓方知識)에다 화란인 내과의사에게서 배운 양방지식(洋方知識)까지 겸비한 공은 이 곳 무의촌(無醫村)을 지키며 무수한 인명(人命)을 구제(救濟)하였다.

 

 

 

공은 슬하에 3남4녀를 두고 1987년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타게하니 공의 불행한 서거를 애통해 하는 주민들의 호곡(號哭)이 하늘에 닿았다.이제 가심지 4년 우리면민 일동은 공의 생전에 끼치신 숭고한 자취를 오래도록 기리고자 작은 빗돌에 그 공적(功績)을 일단(一端)에 새기니 후손과 행인들은 공의 그 찬연한 업적을 기리 본받을 진저.

1991년 5월 15일 현도면민외 유지일동이 세웠다 [비문내용참조]

 

 

 

독립운동가 안승갑(安承甲).
충북 청원 출신인 그는 한때 포로들을 감시하던 일본 군속이었다. 하지만 머나먼 이국땅에서 고려독립청년단을 조직하는 등 항일독립운동가로 거듭났다.

본관은 순흥안씨(順興安氏), 호는 낙산(諾山). 청원군 현도면 죽전리 출생인 독립운동가 안승갑은 아직 자신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해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보훈처는 낙산 선생의 가족들이 올린 포상 상신을 거절했다. 가족들은 보훈처에 3번 포상상신을 올렸지만 지정받지 못하자 실망하고 있다. 그의 가족들은 부친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수많은 자료를 제출했음에도 포상상신에서 계속 미끄러지자, 실망에 가득 차있다.

자바에서의 반일 고려독립청년단 실기 원고 부친의 독립운동 자체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가족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


부친의 독립운동 활동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가장 안타까워 하는 이는 그의 아들이다. 낙산 선생의 아들은 현재 충청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다. 안용근 교수가 그 주인공.
안 교수에 따르면 낙산 선생은 부강공립보통학교 재학시 청원군 부용면 금호리의 친구 김상희(金相熙) 씨 집을 놀러다니던 중 그 동네 항일운동가에게 영향을 받아 현도면 죽전리에서 소년단과 청년단을 조직해 야학을 개설했다.
졸업한 후에는 음성군 금왕면 전작기수(畑作技手·산업계)로 발령받았다. 이때 요시찰 인물로 고등계 형사가 쫓고 있던 무극리 2구 장기형(張基螢) 씨와 접선한 것이 발각돼 일본군에 입대할 것을 강요받았다. 일본군에 입대하는 것보다는 포로감시를 하는 군속으로 지원해 1942년 6월 부산 서면에서 조선인 군속 3천100여명과 2개월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군속들은 배를 타고 태국, 미얀,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으로 파견돼 일본군에게 패해 잡혀 있던 연합군 포로 감시 업무를 맡았다.

인도네시아 자바(Java)에는 1천400명이 배속돼 자카르타, 반둥, 치라참, 스라바야, 스마랑 등의 포로수용소로 배치됐다.

1945년 12월16일 재자바 조선인민회 반둥지부원 사진(지부장 안승갑 선생)

낙산 선생은 자바 반동(Bandoong)시 일본 제16군 포로수용소 제1분소 제1분견소에서 포로감시 업무를 맡다가 제2분견소 제2분소로 이동해 네덜란드군 포로의 부녀자억류소(抑留所) 감시 업무를 맡았다.

낙산 선생과 같이 근무한 동료 중에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위해 싸우던 게릴라군을 이끌었던 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양칠성 선생이 있다.

"우리는 선열의 위업을 거울삼아 조국 독립의 선봉이 돼 일심동체 결사 투쟁할 것을 자바섬 스모노 산중에서 엄숙히 선언하노라."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4년 12월29일 한반도에서 수천㎞ 떨어진 인도네시아 자바섬. 조선인 청년 10여명은 '고려독립청년단'이라는 항일운동단체가 결성됐다.
이 단체 회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일본군 소속 포로감시원이었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일본군으로부터 극심한 차별 대우를 받아왔다. 고려독립청년당의 결성은 이런 극심한 차별대우와 함께 인근 국가인 필리핀·미얀마의 독립 선포에 고무됐기 때문이었다.
청년단원 가운데 3명은 1945년 1월 자바섬 동부 암바라와에서 일본군 12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내고 장렬히 자결했다.

1945년 8월 조국은 해방을 맞았지만, 낙산 선생을 비롯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1년 반이 넘도록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일본군'으로 취급돼 연합군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일부는 B·C급 전범으로 수용소에 갇혔다.

낙산 선생은 자치조직 '조선인민회'의 지부장을 맡아 이 기간 조선인 인명부, 일본의 강요로 저축한 예금 내용을 적은 '사금회수증명서' 등의 자료를 남겼다. 안 교수는 본보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야학을 개설하고 독립운동가들과 접촉을 하다 일본 순사에게 발각돼 일본군 군속(軍屬)으로 지원해 몸을 피했다"며 "군인이 아닌 군속으로 가면 죽을 일은 없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고 했다.

그는 "일본은 조선인 군속들에게 약속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강제로 저축하게 하고 이를 돌려주지 않았다"며 "부친은 1947년 2월 귀국한 뒤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체불 임금과 위로금 배상 청구 운동을 벌이는 한편, 고려독립청년단 활동가들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도록 힘을 기울였다"고 했다.

그는 지난 수십 년간 모은 자료들을 올해 '낙산(안승갑 선생의 호)유고'라는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낙산이 스케치한 구로독 수용소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조선인 포로감시원 가운데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있다는 것은 대중에게는 아직 생소하다"며 "이들의 기구한 삶을 60년 만에 들여다보는 뜻깊은 자료"라고 짚었다.

낙산 선생에 관한 자료는 블로그
http://blog.daum.net/annygn/ 와 카페 독립운동가 안승갑선생 http://cafe.daum.net/Yanggonggong에서 찾아볼 수 있다.[충북일보 2014.02.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