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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읍 묵방리 이홍연묘지(內秀邑 墨坊里 李弘淵墓地)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내수읍 묵방리 이홍연묘지(內秀邑 墨坊里 李弘淵墓地)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5. 21. 13:45

 

이홍연은 1604(선조 37)∼1683(숙종 9).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한산(). 자는 정백()·이정(), 호는 삼죽(). 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이고, 아버지는 대사간 덕수()이며, 어머니는 조씨()로 수륜()의 딸이다. 조희일()·정홍명()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생원시에 합격, 1636년 의금부도사로 임명되었으나 사퇴, 뒤에 세마()를 거쳐 시직()으로 병자호란을 만나 왕세자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호종하였다.

이듬해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간이 되어 조의()를 뿌리치고 조석윤()과 함께 김자점()을 탄핵하여 갑자기 귀양보내게 하였다.

효종 즉위 후 좌승지·황해감사·대사간·예조참의·병조참의·형조참의 등을 두루 거쳐, 호조참판·도승지에 올랐다.

이 해 김수항()을 변호하다가 삭직, 이듬해 다시 서용되었고, 1680년 의금부당상관으로 경신대출척의 옥사를 다스려 허목() 등을 숙청하였다. 그 뒤 다시 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를 지내고 좌참찬으로 기로소에 들어갔다

이홍연 [李弘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가정(, 이곡())ㆍ목은(, 이색()) 양대[]가 고려 말엽에 크게 이름을 떨쳤으니, 그 본관()은 한산()이다. 중국 사람 역시 동국()에 한산 이씨() 인재(, 이종학()의 호)가 나라가 바뀔 때에 목숨을 바친 것을 알고 있는데, 이를 인하여 3대가 한산 원사()에서 묘식()을 하고 있다. 인재의 8대손 이유공() 이덕수()는 벼슬이 대사간()으로 찬성()에 추증되었다. 그는 마음이 어질고 후덕()하여 세상의 추중()을 받아 청음(, 김상헌()) 문정공()이 바로 그 묘비명()을 지었다. 이유공이 풍양 조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력() 갑진년(, 1604년 선조 37년) 8월 25일에 공을 출생하였다.

공의 휘()는 홍연()이요, 자()는 정백()인데 처음 자는 이정()이었다. 조씨의 아버지
조수륜()은 호가 풍옥헌()으로 행의()가 순수 돈독하여 문간공() 성 선생(, 성혼())의 고제(, 뛰어난 제자)로 우직()하고 단정하였다. 풍옥에게 아들 조척()이 있어 효행()으로 알려졌다. 공의 나이 10세 때 이유공의 명으로 취학()하게 되었는데, 명하는 것은 공경하여 듣고 절대 친압()하는 뜻이 없었다. 이보다 앞서 이유공이 풍옥공의 무옥()에 연루되어 처음에는 이산()으로 귀양을 갔다가 평창()으로 이배()되었다. 이때 공은 한결같이 따라가 이를 인연해 죽음() 조희일()과 기옹() 정홍명()에게 배워 문예()가 날로 진보되어 17세 때 동당시()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그러자 이유공이 너무 일찍 성취하는 것을 경계하여 마침내 물러나 자수()하였다. 그러다 이유공이 사유()를 받아 돌아와 향리()에서 날마다 종족()들과 더불어 지팡이와 짚신 차림으로 시를 읊으며 소요하니, 공은 안으로는 집안 일을 맡아 처리하고 밖으로는 빈객()을 접대하는 등 지물()의 봉양을 갖추 다하였다.

천계() 계해년(, 1623년 인조 원년) 인조()가 즉위하자 이유공은 아주 서울로 돌아왔다. 이듬해 갑자년(, 1624년 인조 2년)에 공이 생원시()에 합격하여 태학()에서 공부하였는데, 사우()들이 추중()하였다. 신미년(, 1631년 인조 9년)에 할머니 임 부인()이 돌아갔는데 이때 이유공은 이미 거상()할 나이가 아니어서 공이 성신()을 다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였다. 을해년(, 1635년 인조 13년)에 공량 대왕(, 인조의 생부 원종())을 추숭()하고 경과()를 시행했는데, 공은 처음에 글을 올려 부당함을 다투었기 때문에 경사의 은전()을 입는 것이 초심()에 어긋난다고 하여 마침내 응시하지 않으니, 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관학()의 선비들이 이 문성(, 이이())과 성 문간(, 성혼()) 두 선생을 문묘()에 종사()하기를 청하였는데, 동지() 가운데도 취사() 선후()에 대한 이론()이 없지 않았으나 공이 힘껏 주선()하여 마침내 김 문경공(, 김집())에게 나아가 시비를 질정()해서 사론()이 나뉘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병자년(, 1636년 인조 14년)에 의금부 도사()가 되었으나 숙배()하지 않았다. 또 익위사 세마()에 제수되고 시직()으로 승진하여 세자()를 모시고 남한산성()에서 난리를 겪었다. 정축년(, 1637년 인조 15년)에 세자가 장차 심양() 행조()로 가게 되어 황급히 분문()하게 되었는데 부모가 뒤떨어지게 하였다. 이해 가을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랑()이 되었는데 전조()에서 사간원 정언()에 의망()했으나 좋아하지 않은 자가 심양에 가는 것을 모면()했다고 배척하여 백간(, 탄핵하는 글)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공은 조정에 있는 것이 불안하여 외직을 구하여 부안 현감()이 되었으나 본도()의 아사(使)인 자가 일로써 논파()시켰다. 그래서 돌아와 어렵()을 일삼으며 정양()하였다. 임오년(, 1642년 인조 20년)에 조 부인()의 상()을 당해서 슬퍼함이 예()보다 지나쳤으며 모든 예를 다 갖추었다.

복제()를 마치고 병조 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이때
유백증()과 오정일()을 탄핵하는 논의가 있었는데 말에 갈래가 많았었다. 공은 각박한 말을 하지 않고 대략 그 시비를 밝히자 이쪽저쪽 모두가 기뻐하지 않아 진로()가 아주 곤란하게 되었으나 공은 후회하지 않았다. 을유년(, 1645년 인조 23년)에 이유공이 돌아갔다. 복제()를 마치고 양사()와 시강원()을 출입하였다.

경인년(, 1650년 효종 원년)에 서장관()으로 연경()에 가면서 역관() 무리를 엄히 단속하여 금지된 물품을 몰래 매매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신의 일을 마치고 다시 사간()이 되어 적신() 김자점()을 논핵()하였다. 이때 김자점이 몰래 청나라에 참소하였는데, 청나라에서 군사로 국경을 압박하였으므로 틈이 생겨 여섯 차례 사신이 와서 공갈하여 중외()가 동요하였다. 그래서 조정의 의논이 모두 빨리 김자점에 대한 논핵을 정지해야 한다고 했으나, 공은 듣지 않고 낙정()
조석윤()과 함께 더욱 힘껏 논핵하여 마침내 김자점을 찬축()하고 말았다.

집의()와 보덕()을 역임하고 임진년(, 1652년 효종 3년)에 승정원()에 들어가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이르러 임금의 명을 출납()하였는데, 효종()이 아주 권우()하여 일찍이 공의 집이 불탄 것을 알아 매우 돌보아 하사한 것이 매우 넉넉하였다.

공조 참의()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 부평 부사(使)가 되었다가 어떤 일로 의금부에 나아가 심문을 받고 갑오년(, 1654년 효종 5년)에 천안()에 도배()되었는데, 사유()를 입고 다시 서용되었다. 병신년(, 1656년 효종 7년)에 좌승지로서 황해 감사()가 되어 폐정()을 닦고 폐단을 고치니, 서쪽 백성들이 거기에 힘입었다. 무술년(, 1658년 효종 9년) 겨울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는데, 이는 대개 공이 일찍이 시의()에 영합하지 않아 청선()이 막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공의()가 바야흐로 펴져 체직되었다가 다시 들어온 것이다. 이때 이유란 명문() 집안의 아들이 있었는데 윤휴()를 노예처럼 섬겨 진신()들로부터 명예를 얻어 추천()을 받기까지 하였다. 공이 탄핵하여 바로잡고 아울러 천주()까지 배척하자 물의()가 시끄럽게 공을 공격하였다. 공이 다시 두루 실상을 거론하여 아뢰자 이 때문에 비난이 더욱 세상에 가득했다. 그 후 현종()이 친히 이유가 숙모()에게 성내며 욕을 한 편지를 보고 특별히 형신()하여 유배()하라 명하여, 사람들이 그제야 공의 공정()함에 감복하였다.

예조()ㆍ병조()ㆍ형조()의 참의()와 대사간(), 승지()를 역임하고 관동()과 호서(西)를 안찰()하였다. 또 병조ㆍ형조와 간장()을 역임하였는데, 이때 공의 나이 이미 회갑()이 넘은 데다가 또 새로 막내 아들의 상()을 당해 더욱 세상일에 뜻이 없어 한결같이 제배()를 사양하고 외직을 구하여 회양 부사(使)가 되어 병을 조리하며 정양()하였다. 잠시 들어왔다가 다시 서천 군수()로 나갔으며 다시 호서 감사(西)가 되었다. 체직되어 들어와 다시 여러 조()를 두루 돌고 혹은 승지와 대사간을 지냈다.

계축년(, 1673년 현종 14년)에 대신의 천거로 품질()이 올라 형조 참판()이 되었고, 대사간()ㆍ경기 감사()ㆍ도승지()를 역임하였다. 이때 흉인() 박헌()이 상소하여 자성()을 모함하였는데 그 상소는 다른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어서 공이 도승지로서 조사하여 죄를 주었다. 이때 주상()이 어려서 흉당()들이 공공연히 패역()을 드러내 자성을 미워하고 꺼려 반드시 해치려 하였다. 문곡(,
김수항()) 김 상공()이 피눈물을 흘리며 상소하여 임금의 마음을 깨우치기를 바랐는데 흉당들은 도리어 더욱 멋대로 모함해서 찬축()하라는 명까지 있게 되었다. 공이 상소하여 변명해서 신원()하다가 윤휴 등의 노여움을 사서 견파()되어 집에서 한가하게 지내다가 1년이 넘어서야 서용()되었다. 공은 스스로 세록지신(祿)이라 하여 차마 서울을 멀리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산반()에 있었다.

정사년(, 1677년 숙종 3년) 겨울에 장시()하여 흉도()들의 간악()한 부정을 적발하자, 떼를 지어 일어나 죄에 빠뜨리려 하여 마침내 일로 인해 중상()하여 정리()에게 나아가 유배()되었다. 연한()이 차 사유()를 청해 수서()하여 다시 한성 좌윤()ㆍ병조 참판ㆍ호조 참판ㆍ행 판결사()를 제수받았다. 중간에 승자()의 명이 있었으나 홍우원() 등의 저지를 받았다.

경신년(, 1680년 숙종 6년)에 흉당들이 역모()를 꾸미다가 복주()되었는데, 공은 금오 당상()으로 국문()에 참여하였다. 다시 대사간이 되었으며 후에 의언(, 죄의 형량()을 정하는 일)한 공로로 한 자급을 올리게 되었는데, 임금이 특명으로 초자()하고 또 보사 공신() 원종훈()에 책록()하여 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얼마 후 공조 판서()와 의정부 좌참찬()을 지내고 나이 70세여서 기로소()에 들어갔다.

임술년(, 1682년 숙종 8년)에 예궐()하다가 갑자기 마루턱에 걸려 넘어지니, 임금이 내시()에게 부축하여 나가게 하고, 또 의약()을 하사하였다. 계해년(, 1683년 숙종 9년)에 대신의 말에 따라 우로()의 은혜로 특별히 숭정 대부() 품계로 올랐는데, 공은 이미 병환이 나 있어 마침내 그해 3월 26일에 서울 집에서 졸()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유언()하여 심의()로 염습()하게 하고, 또 자손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선대의 업()을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5월 25일에 청주() 작천() 북쪽 화죽리() 해향()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전부인() 전주 이씨()는 부제학() 이호신()의 딸로 공정 대왕(, 정종())의 별자() 후손인데, 나이 25세에 죽었다. 온인() 자혜()하여 매우 부덕()이 있었다. 아들 이여직()은 부사(使)요, 이기직()은 군수()이다. 후부인() 김씨()는 감사() 김상()의 딸이다. 아들 이광직()은 문과()에 급제한 지평()으로 준재()인데 일찍 죽었으며, 세 사위는 부사(使) 심익상(), 유학() 윤천준(駿), 박진()이다. 부사의 아들은 이수필()ㆍ이수형()이며, 사위는 권흡()ㆍ박필명()ㆍ안윤희()ㆍ조윤벽()이다. 군수의 아들 이수문()은 사평()이요, 사위는 최석필()이며, 이수익()ㆍ이수겸()ㆍ이수절()은 측실() 소생이다. 지평의 사위는 감사()
김진귀(), 유학() 조명인(), 한영조()요 후사()는 이수형()이다. 심 부사(使)의 아들은 심정규()요, 사위는 맹만석()이다. 윤천준은 2녀 1남을 두었다. 이수필은 3남 1녀인데, 아들은 이사성()ㆍ이사도()ㆍ이사의()이며, 딸은 윤봉장()에게 시집갔다. 권흡은 후사가 없으며, 안윤희는 1남 1녀이며, 김 감사()는 7남 2녀인데, 아들은 김춘택()과 김보택()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조명인은 1남 2녀이며, 한영조는 딸 하나이다. 이수형은 1남 1녀인데, 아들은 이사제()요, 딸은 시집가지 않았다.

공은 어버이 섬기기를 뜻을 받들어 그 마음을 즐겁게 하는 봉양을 하였으며 부모가 하고자 하는 바는 성의를 다하였다. 처세하는 데 언행이 어긋나는 일이 없고 자수()를 매우 독실하게 하였으며 말을 꾸며 남을 속여 명성 얻는 것을 가장 미워하였다. 일찍이 자제에게 경계하기를,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먼저 뜻을 세워야 한다. 선()과 불선()은 나에게 있고 알아주고 몰라주는 것은 남에게 있으니, 마땅히 나에게 있는 것을 닦을 뿐이다. 비방()에 처하는 도리는 오직 자기를 반성()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어린 누이가 병을 잘 앓아 지성으로 치료했으며 이를 종당()에 미루어 은의()가 곡진하였다. 집에서 교육하는 자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이 많이 와서 의지하였다. 이유공()이 세업()을 이으면서부터 공이 또 살림에 마음을 쓰지 않아 조정에 선 50년 동안 영위()한 바가 없이 오직 구업()을 지켰으며 더러 제부()에게 양보하기도 하였다. 제사에는 성의를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뜻이 이르지 않음이 없어 중외()의 예()를 좋아하는 집안이라도 거기에 미칠 만한 집이 드물었다. 거상()하면서는 쇠로하다고 해서 조금도 태만히 하지 않아 조문()하는 자들이 감동하였다. 평소 거처할 때에도 일찍이 게으른 모습을 한 적이 없었으며 노년에 이르러서도 다른 사람 접대를 공손히 하고 서책() 보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고 의복()과 기용()은 검약()하기에 힘썼다. 벼슬길에서 재빨리 승진하려는 뜻을 두지 않아서 항상 임용과 산반()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논()하는 자들이 말하기를, “그 누구만 못하여 성대()한 옥당() 벼슬을 하지 않았던가?”라 하였으니, 공의()란 속이기 어렵다고 하겠다.

가장 원망()을 잘 잊어서 비록 일찍이 그 사람에게 비난과 배척을 받았더라도 그 사람을 대하면서 한결같이 무심()하였다. 여러 차례 번곤()을 맡았는데 조치하여 처리하고 청단()하는 데 반드시 방도를 다하였고, 항상 게을리 노는 자를 미워하였다. 일찍이 흉년을 만나 말하기를, “저 떠도는 거지로 평일 일을 하지 않은 자는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으니, 진제()를 양민()보다 뒤에 해야 한다. 양민들은 일년 내내 부지런히 괴롭도록 일을 하고도 면치 못하고 있으니, 이들이 불쌍하다.”고 하였다. 공의 훌륭한 말씀과 아름다운 행실은 이루 다 열거할 수가 없으나,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이유공() 및 풍옥공() 양대[]에서 나온 것이어서, 사람들이 어진 부형()을 좋아하는 것을 믿을 수 있겠다.

공은 나의 이성() 친척이어서 매우 친한데다가 내가 또 일찍 공의 집에 들어가 이유공의 덕의()를 익히고 인하여 공의 계술()함에 게으르지 않고 일 처리가 매우 후한 것을 사모하였었다. 이제 부사(使) 형제가 와서 묘명()을 청하는데 나의 정신이 쇠약해져서 전후의 일을 잘 잊게 된다. 그래서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그 대강을 위와 같이 열거한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마읍(, 한산)의 산천 울창하고 청명()하네. 큰 인물을 출생시켜 세상에 크게 울렸네. 근원이 깊고 멀리 흘러서 여러 공경()을 배출했네. 아름다운 이유공() 덕()은 높고 벼슬은 낮았네. 공은 태어나면서 단정하고 빼어나서 집안을 이었네. 그 효우()를 누가 흠잡으랴? 공은 약관()의 나이에 크게 변통하는 때를 당하였네. 왕조()의 모범이 되었으니 모두 우리의 부형()이었네. 선조의 업() 계승하여 몰래 탄정()을 도왔네.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대성() 관직 역임했네. 정직하여 아첨하지 않으니 굽은 자들 꺼려했네. 굴신()함 내게 달렸으니 반성한들 병될 게 무엇이랴? 사람들은 혹 흠이라지만 자신은 그 주변을 믿었네. 지난번 모욕당할 적에 흉악한 자들 둘러서 있어, 용렬한 모습 지나쳐 고단하게 핍박당하였네. 마침 자성()을 뜻밖의 일로 얽어매니, 부끄럽게 여겨 상소하여 찬축()당했는데, 성상께서 공을 잘 아시어 곧 사유()하셨네. 경신년() 경화()로 흉도들 주멸()되고, 옥사()를 의언()하여 다시 대사간()이 되었네. 이에 원종훈()에 참여하여 임금의 은혜 융숭했네. 공로와 나이로써 2품()으로 초자()하여 일에 참여했네. 임금이 노쇠함 불쌍히 여겨 넘어짐을 부축하라 명하였네. 이에 공은 명심()하여 더욱 충성 다하기를 생각했네. 임금의 권우() 쇠퇴하지 않아 작록이 넉넉했네. 이는 공이 바라는 바 아니어서 놀라는 듯 처신했네. 팔순의 나이는 새벽 별처럼 드물었네. 홀연히 서거하였지만 장수하였으니 어찌 슬퍼하랴? 작천()가의 언덕에 공의 무덤 있네. 내가 그 비석에 명()을 쓰는데 질박하고 화려하지 않다네.

[李弘淵]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