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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읍 묵방리 이덕수 묘지(內秀邑 墨坊里 李德洙墓地) 본문
이덕수는 내수읍 묵방리 한산이씨들이 자리한 선산 맨 윗쪽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전기의 문신이다.
묘비와 상석 망주석2점과 문인석2점이 자리하고 있다.
이덕수는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사로(師魯), 소자(小字)는 여숙(汝淑), 호는 이유당(怡愉堂)이다. 영의정 이유청(李惟淸)의 후손이며 이도(李濤)의 아들로 일족인 현감 이준(李浚)에게 입양되었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선대로부터 청주 북일면 상당산(上黨山)[419m] 아래에 우거(寓居)하였다.
한산인 이덕수의 묘역은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묵방리 뒤 구룡산(九龍山)[163.6m] 노적봉에 있다.
1606년(선조 39) 진사(進士)가 되고 160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검열(檢閱)이 되었다가 저작(著作)·박사(博士)를 역임하였다.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나자 장인인 조수륜(趙守倫)과 함께 연루되어 이산(理山)으로 유배되었으며 1618년에 창평으로 이배되었다가 1621년에 풀려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수용(收用)되어 전부(典簿)에 임명된 뒤 예조좌랑 겸 춘추관의 기주관과 지평을 지내고,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공조정랑으로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어 인조를 공주까지 호가하였다.
1632년 부수찬으로 왕세자 가례(嘉禮)에 공이 있다 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1634년 우부승지로 있을 때 강석기(姜碩期) 등과 인조의 사친(私親)인 원종(元宗)의 입묘(入廟) 논의에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연산에 귀양 갔다가 1636년에 풀려나 승지가 되었다.
이듬해 좌부승지로 관서지방에 무재(武才) 시험관으로 갔다가 병자호란을 당하여 부득이 돌아오지 못하고 영북(嶺北)으로 향하여 여러 도에 격문을 보내고 격려하다가 이듬해 돌아와 승지가 되었다. 그뒤 이조·형조의 참의와 여러 차례의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호란 후 청나라의 갖은 횡포가 심하자, 표면상으로 그들을 위문한다는 명목으로 적진에 들어가 적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1641년 한때 강원감사로 나갔다 돌아와 이조참의로 있다가 1645년 죽었다.
지금은 없어졌으나 상당구 주성동에 있는 이덕수가 세운 이유당(怡愉堂)이란 정자가 있었다 한다.
고려 충신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 선생(李先生)의 자제 이종학(李種學)의 호(號)는 인재(麟齋)요, 추밀직학사(樞密直學士)이다. 그 자제 이숙야(李叔野)는 광주 목사(光州牧使)요, 그 자제 이축(李蓄)은 황해도 관찰사요, 그 자제 이훈(李塤)은 좌참찬으로 증시(贈諡) 안소공(安昭公)이요, 그 자제 이유청(李惟淸)은 좌의정인데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 이언홍(李彦洪)은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이요, 경력의 자제 이소(李沼)는 무주 현감(茂朱縣監)이며 이준(李浚)을 낳았으니 과천 현감(果川縣監)이다. 판윤(判尹) 임열(任說)공의 문에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어 동종(同宗) 이계(李洎)의 손자 증(贈) 승지(承旨) 이도(李濤)의 제4남을 취하여 후사로 삼으니, 휘(諱)는 덕수(德洙)요, 자(字)는 사로(師魯)이다. 어머니는 성주 이씨(星州李氏)이니 고려 장군(將軍) 이총언(李悤言)의 후손이요, 증 참판(參判) 이석명(李碩明)의 딸이다.
승지공은 대대로 서울에서 살다가 집안에 슬픈 일이 있어 만력(萬曆) 병자년(丙子年, 1576년 선조 9년)에 가족을 이끌고 서원(西原)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인 정축년(丁丑年, 1577년 선조 10년) 9월 초7일에 공이 태어났으니 어려서부터 중후하고 민첩하였으며 가벼이 말하거나 웃지 않았고 단정하게 걷고 보아 마치 열 댓살되는 아이와 같았다. 부모가 사랑하고 아껴 고학(苦學)을 시키려 하지 않았으나 스스로 다잡아 독서하며 신고(辛苦)를 견디어 내니 문의(文義)가 날로 진전하였다. 성장하자 겸손하고 온화하며 정직해서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으며, 정성스러움이 실로 충만하여 사람들 모두가 장자(長者)라고 일컬었으나, 기품이 굳세어서 옳지 못한 곳에 임해서는 분명히 스스로를 지키니 사람들이 더욱 존중하였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해구(海寇)가 갑자기 침범해 오자 승지공은 멀리 피하지 못하고 흉봉(凶鋒)의 해를 입었다. 다음 해인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 과천공(果川公)이 병으로 졸하니, 무주공은 평소의 유언에 따라 상(喪)으로 인해서 후사(後嗣)를 세우고 양모인 임 부인(任夫人)을 받들게 하였는데 정국이 어지러운 때에 떠돌아다니며 힘을 다해 봉양하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다음 해인 갑오년(甲午年, 1594년 선조 27년)에 생모인 이 부인(李夫人)이 세상을 떠났고, 을미년(乙未年, 1595년 선조 28년)에 무주공이 이어서 졸서(卒逝)하니 4년 사이에 거듭 큰상사를 당하여 슬프고 초조해서 거의 성명(性命)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정유년(丁酉年, 1597년 선조 30년)에 왜구(倭寇)가 다시 쳐들어왔다. 임 부인(任夫人)을 받들고 관서(關西)로 피난하였는데 평택수(平澤守) 조윤(趙倫)이 그가 현재(賢才)란 말을 듣고 제생(諸生) 가운데서 뽑아 딸을 출가시켰으며, 오랫동안 처가에 있었는데 서로 몹시 즐거워하였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에 서울로 돌아왔고, 병오년(丙午年, 1606년 선조 39년)에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2년 뒤인 무신년(戊申年, 1608년 광해군 즉위년) 겨울에 문과에 올라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고, 2년 뒤인 경술년(庚戌年, 1610년 광해군 2년)에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으며, 다음 해인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에 박사(博士)에 승진하니 한 때의 동료들이 첫째로 춘추관에 추천하려 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에 무고옥(誣告獄)이 일어나자 조 평택과 같이 화망(禍網)에 걸려 멀리 서쪽 변방 이산(理山)에 유배되었으나 평탄한 마음으로 대처하였고 근심으로 그 중심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이때 임 부인의 나이 70세에 늘 어머니를 모실 수 없음을 염려하여 가족을 곁에 두어 모시게 하니 임 부인은 편히 여겼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자식이 없다가 자식을 두면서 한 가지 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무오년(戊午年, 1612년 광해군 4년) 겨울에 호남(湖南)의 창평(昌平)으로 배소가 옮겨졌는데 난리 이후 남쪽으로 낙향한 현사(賢士)가 날마다 그 문에 나아가 사귀기를 청하였고 더불어 수석(水石) 사이를 노닐며 속박 없이 내키는 대로 즐겼다. 신유년(辛酉年, 1612년 광해군 13년)에 조정에서 유배인들을 용서한다는 명이 있어 공은 현헌(玄軒) 신공(申公, 신흠(申欽))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온 가족이 교유(交遊)를 끊고 날마다 형제 및 옛친구와 어울렸으며, 그 사는 곳을 이유(怡愉)라고 이름하였다.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반정(反正)이 있자 곧 전적(典籍)으로 임명되었다가 예조 좌랑으로 옮기면서 춘추관 기주(春秋館記注)를 겸하였고, 겨울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전적으로 옮겼으며, 또 공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공주(公州)에서 거가(車駕)를 호종하였고, 체찰사(體察使) 오리(梧里) 이공(李公, 이원익(李元翼))이 청하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반적이 평정되어 환도(還都)하자 다시 지평에 임명되었다가 정언이 되었는데 곧 어버이가 늙었음을 들어 걸양(乞養, 봉양을 위해 수령으로 나가겠다는 요청)해서 순천 현감(順天縣監)으로 나아가니 고을 사람들이 다시 팔마1)(八馬)를 읊조리며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마침 일을 같이 하던 고관(考官)이 미움을 살 만한 일을 많이 하자 공은 추하게 여기고 명단을 게시하기 전에 먼저 달려나갔다. 그러므로 같이 일을 하던 자들은 모두 사헌부의 지탄을 받았으나 공은 홀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년)에 벼슬을 버리니 고을 사람들이 수레를 붙들고 매달렸으며 유임시킬 수 없게 되자 서로 함께 돌을 깎아 공적을 기록하였다.
내직으로 들어와 지평ㆍ직강ㆍ정언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예조 정랑ㆍ사서ㆍ필선 등 직책에 임명되었는데 이로부터 지제교(知製敎)는 늘 띠고 있었다. 또 선발되어 홍문관에 들어가 수찬ㆍ교리를 거쳐 장령ㆍ직강이 되었고, 3년 뒤 신미년(辛未年, 1631년 인조 9년)에는 사도시 정(司寺正)이 되었다. 8월에 임 부인이 90세에 일어나지 못하니 공은 여묘(廬墓)살이로 3년을 마쳤는데 전에 도감(都監)에 있었던 공로로 명에 의하여 비옥(緋玉, 당상관의 복장)을 가하도록 명하자, 공은 갑절로 슬퍼하였다. 상복을 벗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에는 좌부승지에 올랐다. 이때 장릉(章陵, 인조의 생부 원종의 능)의 추숭전례(追崇典禮)가 있자 삼사(三司)에서 거세게 간쟁(諫爭)하였다. 임금은 크게 화를 내어 모두 유배시키라 명하니 공은 개연히 동료에게 말하기를, “직책이 근시(近侍)로 있으면서 이러한 과오를 보고 시정치 않으면 누가 그 허물을 맡겠는가?” 하고, 전지(傳旨)를 봉환(封還, 되돌려 보냄)하기를 세 차례나 하면서 임금은 더욱 화를 내어 법사(法司)로 내리라 명하고 명을 어기는 자는 죽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하교를 하였다. 온 집안이 두려워하였고 찾아와 위로하는 자가 있었는데 단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죄이다.”라고 할 뿐이었다. 대장(臺章)으로 힘이 다하여 물러나려 할 때에 마침 대신이 차자를 올려 구원함으로 해서 연산(連山)에 부처(付處)되었다.
공은 평소 사계(沙溪) 김 선생(金先生,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여겼다. 선생이 몰(歿)하자 곧 그 이웃으로 옮겨가 부자와의 종유를 이루며 경술(經術)을 담론하고 고금을 평론함에 있어 풍부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원근에서 풍문을 듣고 그 덕에 훈도되려는 자가 점점 많았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년) 5월에 용서를 받고 미처 도성에 들어오기 전에 승지에 제수되니 공은 특별한 처우에 감격하여 서둘러 올라와 사은(謝恩)하였다.
이때 서변(西邊)의 보고가 급박하므로 임금이 제신들을 불러 물으니 모두 이해(利害)를 들어 말하였으나, 공은 홀로 아뢰기를, “귀중함은 의(義)에 합당한가에 달려 있고, 강약은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화전(和戰) 사이를 오가며 기모(奇謨)로 이기려 한다면 일을 그르치지 않는 경우가 적고 또한 백성들의 소망도 잃게 됩니다.” 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고 좌우에서도 모두 귀담아 들었다. 겨울에 명을 받들고 관서에서 무재(武材)를 시험보였다. 얼마 아니 있어 적병이 크게 침범해 들어오자 어쩔 수 없이 영북(嶺北)으로 나아가 제도(諸道)에 격문(檄文)을 보내어 공동의 적으로 여기기로 약속하였다. 이듬해 조정으로 돌아와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다가 곧 여러 조(曹)의 참의로 옮겼으나 마침 눈병이 심하여 모두 취임하지 못하였다.
무인년(戊寅年, 1638년 인조 16년)부터 경진년(庚辰年, 1640년 인조 18년)까지 3년 동안 내리 이조ㆍ예조ㆍ병조의 참의와 승지ㆍ대사간을 역임하니 무릇 8, 9차례에 더러는 병이 있어 모두 오래도록 자리에 편히 있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드러난 바는 없었다. 뒤에 적인(敵人)이 병력을 앞세워 온갖 공갈을 하므로 인하여 근신(近臣)을 보내 위문하고 겸하여 적정을 살피려 하는데, 사람들은 대부분이 두려워하여 기피하였으나 공은 이를 돌보지 않고 분연히 가서 마침내 노수(虜首)와 만났고 본 바를 돌아와 모두 아뢰니 동료들은 공이 일에 임해서 기피하지 않는 의리에 모두 감복하였고 기미를 보고 속셈을 드러낸 자는 대부분이 부끄럽게 여겼다.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년) 여름에 부인상을 맞아 사임하고 돌아가 선영(先塋)에 장사지냈으며 8월에 강원 감사에 임명되니 3대가 추은(推恩)되어 증직이 내려졌다. 임기가 차자 이조에 임명되었고 다시 예조ㆍ이조ㆍ병조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여 체직이 되었다가 곧 병조ㆍ승정원ㆍ이조로 옮겼다. 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년) 여름에 체직되어 예조에 임명되었는데 전날 이조의 장에게 추고하라는 명이 있자 공은 본래 이에 간여된 바 없었으나 구차히 벗어나는 태도를 부끄럽게 여기다가 마침내 파직되었다. 수일 후 감기로 피곤을 보이면서 약이 효험이 없었고, 열흘이 못되어 홀연히 서거(逝去)하니 실은 6월 24일이었다. 이해 10월 초3일 청주(淸州) 상당성(上黨城) 아래 유토랑지산(柔土郞之山) 미향(未向)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부인과는 같은 영내(塋內)에 실(室)을 달리하였다.
부인 풍양 조씨(豊陽趙氏)는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조정기(趙廷機)의 손녀이고,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조종경(趙宗敬)의 증손녀로 대를 이은 명덕(名德) 밑에서 자라 한 집안 내외 친척이 모두 존경하여 여범(女範)이라 일컬었다.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 이홍연(李弘淵)은 모관(某官)이요, 딸은 승지(承旨) 김익희(金益熙)에게 출가하였으며 1남 1녀는 일찍이 죽었다. 이홍연은 3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이흥직(李興稷)은 생원이고, 다음은 이기직(李基稷)이며, 다음 이광직(李光稷)은 생원이요, 딸은 출가 전이다. 김익희는 3남 1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김만균(金萬筠)ㆍ김만증(金萬增)ㆍ김만항(金萬恒)이요, 딸은 이세장(李世長)에게 출가하였다. 이흥직은 2남 1녀요, 이기직은 1남이며, 이광직은 1녀이다. 김만균은 1녀요, 이세장은 1남인데 모두 어리다.
공은 어린 나이에 화환(禍患)으로 어려워 부모 잃은 슬픔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가전(家奠)은 반드시 정성과 슬픔으로 받들었으며 스스로 봉양(奉養)이 어버이에게 미치지 못했다고 하여 형제에게 미루어 각별하였다. 매서(妹壻)가 시골에 살면서 오래도록 병을 앓자 집으로 맞아들여 의원과 약을 대주었고, 심지어 가난하여 자존(自存)할 수 없는 친척들을 모아 업(業)을 주어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분가(分家)하던 날 말하기를, “천륜(天倫)은 부모가 남기신 바이다. 나에게 유독 후하니 지분을 사양하고 받지 않겠다.”고 하였다. 동종(同宗)의 자손들을 모아놓고 재능이 있는 자는 나아가게 해서 가르치고, 그렇지 못한 자는 구별해 가르쳐서 모두 성취하도록 기하였다. 그리고 늘 말하기를, “사람은 각각 뛰어난 점이 있다. 비록 극히 어리석다 하더라도 반드시 하나의 장점은 있다. 그러니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평생 술의 양이 매우 컸으나 여러 사람과 마실 때에는 뒤로 물러나 피하고 사양하니, 사람들은 그 깊이를 알지 못하였다. 강관(講官) 대신(臺臣)이 되어서는 곧고 비굴하지 않아 그 직책을 다하려 하였고, 자그마한 절의(節義)로 명예를 취하려 아니하였다. 만년에 늘 자제에게 말하기를, “나의 삶을 여러 부형들에게 견줄 때에 수(壽)하였다. 선조 목은공(牧隱公)이 69세에 하세하였다. 나는 비록 견줄 만한 덕은 없으나 60세는 지났다.” 하였고, 죽을 시기를 점치며 말하기를, “을유년(乙酉年, 1645년 인조 23년)은 내가 돌아갈 시기가 아니겠느냐?”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으니 이 말을 듣는 자 기이하게 여겼다. 군자(君子)는 ‘그 사람은 늙었으나 적자(赤子)의 마음을 잃지 않았고, 귀함이 열경(列卿)에 이르렀으나 포소(布素, 선비 시절)의 지조를 고치지 않았으며, 온갖 험난을 겪었으나 처자(處子)의 행실을 빼앗기지 않았다.’ 하였으니 이 말이 믿을 만하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마읍(馬邑)의 산과 모수(某水)는 굽이쳐 흐르고 꿈틀꿈틀 뻗으며 가끔 이인(異人)이 배출되었으니, 목은(牧隱) 노인 이후 2백여 년이라네. 아득히 화려한 후손, 공에까지 이어졌다네. 나는 그 명성을 듣고 그 얼굴도 보아 마음에 간직한 지 오래이나, 잊혀지지 않는다네. 임금 앞에서 바른말로 간하여 곧다는 소리 더욱 드러났다네. 하늘이 선인(善人)을 주었고 은혜로 고향으로 돌아갔네. 백성이 기리는 선정(善政)이었고 인물을 전형(銓衡)하는 소임도 맡았네. 6부(部)의 차관이었고 사람들은 그 숙달(熟達)을 사모하였네. 피로를 느끼자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고 6기(氣)는 쉽사리 잦아들었네. 아! 이제는 어쩔 수 없구려. 나는 다시 이 사람을 볼 수가 없구려.
각주
- 1) 팔마(八馬) : 당 순종(唐順宗) 때에 왕숙문(王叔文)의 당여(黨與)라 하여 먼 지방의 사마(司馬)로 좌천된 여덟 사람. 곧 애주(崖州)의 위집의(韋執誼)ㆍ건주(虔州)의 한태(韓泰)ㆍ태주(台州)의 진간(陳諫)ㆍ영주(永州)의 유종원(柳宗元)ㆍ낭주(朗州)의 유우석
이덕수 [李德洙]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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