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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읍 덕암리 이창렬혜정비 (內秀邑 德岩里 李昌烈惠情碑)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내수읍 덕암리 이창렬혜정비 (內秀邑 德岩里 李昌烈惠情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5. 14. 09:01

 

 

내수읍 덕암리 충북보건과학대학교 정문에서 좌측으로 보면 마이컵과 일미닭갈비 사이로 소로가 있다.이창렬혜정비(李昌烈惠情碑)는 이 소로길을 따라 가면 만나는 인가(人家) 좌측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비석은 파손의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비석에 새겨진 글씨의 정도가 마모되여있다.비석의 전면에는 이창렬혜정비(李昌烈惠情碑)라고 음각되여 있으며 좌우에 작은글씨로 이창렬의 혜정내역을 기술하여 놓았다.

 

 

 

이창렬은 고성인(固城人)으로 원래의 비석위치는 이 곳이 아닌 고성이씨 선산에 있었다고 한다.비석은 후손들에 의하여 선산에서 이 곳으로 이건 된것으로 파악된다.  일제강점기 시절 동리주민들에게 금전적으로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창렬의 은혜와 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 비석의 건립년대는 을축년(乙丑年 1925년)으로 비석의 새겨져 있다. 현재(2016년) 집에 거주하시는 어르신의 연세가 100수에 가깝고 그 어르신의 아버님의 비석이라고 하였다. 풍정리와 덕암리 일대는 고성이씨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고성이씨의 재실인 법두재(法斗齋)가 자리하고 있다.

 

 

 

고성이씨는 경상남도 고성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중서사인()이었던 이반()의 24세손인 이황()이 시조이다. 시조는 한문제() 때 사람인 반()의 24세손 황()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말 이후에 성세를 보였으며,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36명, 상신 1명을 배출하였다. 조선에서 대표적 인물은 원()이다. 그의 가계()는 고려의 명문으로 고조부는 충렬왕 때의 세자원빈()·밀직사판사() 존비(), 증조부는 삼사판사() 우(), 조부는 공민왕때 수문하시중을 지내고 서예로 이름 높았던 행촌() 암(), 아버지는 권근()의 장인으로 역시 공민왕 때 진현관대제학에 이른 강()이다.

원은 세종 때 좌의정에 이르렀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청파극담()》으로 이름난 청파 륙()은 원의 손자이다. 또, 인조 때 난을 일으켰던 괄()은 육의 현손이다.
고성이씨[固城李氏]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