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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탑면 봉황리 김원립신도비(中央塔面 鳳凰里 金元立 神道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중앙탑면 봉황리 김원립신도비(中央塔面 鳳凰里 金元立 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6. 1. 06:36


김원립은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사탁(), 호는 갈천(). 아버지는 찰방을 지낸 김성진()이다.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홍무적() 등과 인목대비의 폐비에 반대하는 복합상소를 올렸다가 광해군의 노여움을 사 금고형에 처해졌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다. 1627년(인조 5)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28년 승정원가주서, 1630년 사헌부지평, 1635년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그 후 사헌부장령, 성균관사예, 성균관직강, 예조좌랑, 호조좌랑, 통례원우통례 등을 역임했으며, 외직으로 해운판관, 부안현감 등을 지냈다.

1636(인조 14) 능주목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전주로 가서 형 김원중 등과 각처의 의병을 규합하였다. 북쪽으로 진격하여 1637년 정월 4일 과천에서 청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얼마 후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삼키며 의병을 해산하였다. 1646년 사간원사간, 사헌부집의를 거쳐 1647년 함경도 종성부사로 재임 중 사냥을 하다가 사냥에 동원된 백성들이 청나라 병사에게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이로 인해 파직되었다.






신도비안내문에 의하면 당초 신도비는 공의 묘소전면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주변환경의 변화로 2005년 5월 현재의 이 곳으로 이봉(移奉)하였다.

후손들에 의하여 신도비각과 주변환경이 정리 되였다.갈천공신도비각(葛川公神道碑閣)이라는 명찰을 달고있다.












박세채(朴世采)가 쓴 김원립의 묘갈명은 아래와 같다.

지난날 광해군() 조정의 (인목 대비()를 유폐()한) 인륜의 변고 때 선비들이 대부분 사특한 의논에 맞장구를 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전원()으로 물러가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계림() 김원립() 공은 겨우 약관()이 넘은 나이로 개연()히 동지들을 거느리고 대궐 앞에 나가 모자()의 대의()에 대해 극구 말하였다. 상소가 상달되자 광해군이 상소의 우두머리 홍무적() 공은 거제()로 귀양 보내고 공은 관직을 삭탈시켜 금고()시켰다. 그 뒤 오래 있다가 인조()가 반정()하여 인목 대비()를 복위()한 뒤에 간신()을 처형하고 선행()을 포상할 때 공을 금오랑(, 의금부 도사())에 임명하였다. 이윽고 대과()에 급제하여 안팎에 출입하였으나 벼슬이 통정 대부() 종성 부사(使)에 그치고 말았으므로 사대부들이 듣고 애석해 하였다. 그 뒤 28년에 공의 종손() 승지()김재현()이 나에게 공의 묘갈명()을 써달라고 부탁하기를, “선조()의 덕행과 공렬()이 매우 성대하였으나 불초()가 어리고 어두어서 자세히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만, 꾸미지 않고 과장하지 않는 것은 또한 선조의 평소 뜻이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고 청합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오래 된 삼세()의 교분을 생각하여 삼가 받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자()는 사탁()인데, 선대의 계통은 신라() 경순왕()에게서 비롯되었고 조선() 초기 제숙공() 김균()의 후손이다. 대대로 번창하고 저명하다가 증조 김돈(), 할아버지 김경명()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하지 않았는데, 김경명이 실은 족제() 판관() 김준걸()의 아들로 후사()를 삼았었다. 아버지 찰방() 증() 호조 참판() 김성진()이 문화 유씨() 영의정() 유전()의 딸에게 장가들어 만력(, 명 신종()의 연호) 18년 경인년(, 1590년 선조 23년) 8월 2일에 공을 낳았다. 공이 4세에 어머니를 여의자 참판공이 가엾이 여겨 12세에 비로소 글을 배우도록 하였는데, 번거롭게 가르치지 않아도 재주와 생각이 빨리 진취되었다. 계축년(, 1613년 광해군 5년)에 태학()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노닐 적에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고 금오랑을 거쳐 제용감 직장()에 이르렀다. 정묘년(, 1627년 인조 5년)에 서쪽 오랑캐(후금(, 뒷날의 청나라)을 지칭)가 침략하여 주상은 강도(, 강화)로 피난가고 세자는 호남에서 군사를 다독거릴 때 공이 수행하였는데, 오랑캐가 물러가자 그곳에서 정시()를 보이라고 명하였다. 공이 그때 제3등으로 합격하여 승문원()으로 들어가 정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승정원()에서는 주서()가 되었고 시강원()에서는 설서(), 문학(), 필선()이 되었고 사헌부()에서는 지평(), 장령()이 되었고 사간원()에서는 정언(), 헌납()이 되었고 성균관()에서는 사예(), 직강()이 되었고 예조()에서는 좌랑(), 정랑()이 되었고 호조()에서는 정랑()이 되었고 통례원()에서는 우통례()가 되었고 군자감()과 종부시(簿)에서는 정()이 되었는데, 한두 번 하기도 하고 서너 번 하기도 하였다. 외직은 해운 판관(), 부안 현감(), 능주 목사(使)를 역임했다. 그 뒤 병술년(, 1646년 인조 24년)에 참판공(, 김성진)의 상()을 마치기에 미쳐 누차 사간(), 집의(), 보덕()을 역임하고 종성 부사(使)에 발탁되었는데, 어떤 일로 파직되었다가 복권되었으나 곧바로 숭정() 기축년(, 1649년 효종 즉위년) 9월 17일에 서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겨우 60세였다. 소무 영국 원종훈()으로 예조 판서(),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세자 좌빈객()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충주() 봉황천() 서남쪽 유좌()에 묻히었는데, 이상이 공의 일생 자초지종이다.

공은 풍채가 뛰어나고 성품이 장중하였다. 집에 있을 때 몸가짐이 숙연()하여 엄한 스승을 대한 것처럼 하였다. 자제들을 예절로 가르치고 손님과 벗을 정성으로 대하되 옳지 못한 점을 보았을 경우에는 반드시 규계()하고 책망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경외()하였다. 여느 사람들보다 청렴하고 검소하여 의복이나 기물이 빈한한 선비나 다름없었고 조석 거리가 누차 떨어져도 태연하게 살았다. 벼슬살이할 때 더욱더 청렴하다는 명성이 드러났고, 진취하는 것을 매우 부끄러워하여 수십 년간 조정에 있었으나 한번도 세도가()의 문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세상의 화리()와 권세는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기어 관청에서 물러나오면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오직 상촌() 신 문정공(, 신흠
())이 평소 공의 현명함을 알고 세자를 모시고 남하()할 때 주상에게 아뢰어 데리고 갔다. 일을 만나면 강개()하여 의논을 공평하게 견지하였으므로 오래도록 대각()에 있으면서 여유 작작한 기풍이 있었다. 위시()를 바로잡고 지나치게 기록된 공신들을 삭제할 때 남김없이 말하였고 뜻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비록 명인()이나 위인()이라도 굽히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그의 지조가 그러하였다. 정치에 숙달되어 관대()와 맹렬()이 알맞았다. 능주에 있을 때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폐단을 제거하며 송사를 잘 처리하니,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편리하게 여겨 신명()으로 일컬었다. 병자년(, 1636년 인조 14년)에 오랑캐가 침범하여 군사를 급히 징발할 때 여러 고을의 군사들은 태반이나 도피하였으나 능주만 제때에 빠짐없이 나왔으니, 그 교화가 깊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고을의 백성이 비석과 비각()을 세워 선정()을 칭송하였고 부로()들이 추모하며 가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부인 하동 정씨()는 영의정() 정인지()의 후손이자 여절 교위(勵) 정응규()의 딸이다. 선생보다 5년 전에 태어나고 선생보다 15년 뒤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소 왼쪽에 묻히었는데, 4남 2녀를 낳았다. 큰아들 김민효()는 정랑()이고 둘째 아들은 김민선()이고 셋째 아들은 김민격()이고 넷째 아들은 김민찬()이고 큰딸은 정랑() 박원개()에게, 둘째 딸은 이계현()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매우 번창하여 다 기록할 수 없다. 나의 할아버지 오창공(,박동량
())이 일찍이 부안()으로 유배되었을 때 공이 마침 부안 현감에 부임하여 매우 즐겁게 지내었는가 하면 나의 선친 형제들과 정의()가 매우 친밀하여 공이 올 때마다 술자리를 펴놓고 이야기할 때 서로 오르락내리락하였는데, 지금 상상해 보면 흉금이 너그럽고 세속을 벗어난 군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

옛날에 사람을 볼 적에 안팎을 비교해 보았도다. 안으로는 지의()가 있고 밖에는 명리()가 있는데, 저것 말고 이것을 취하면 이를 군자()라고 일렀도다. 아! 위대한 김공은 수립한 바가 탁월했도다. 대비를 폐위한 사건은 인륜이 실추된 것이도다. 공이 그때 마침 약관()으로 분연히 붙잡으려고 했도다. 성군 밑에 어진 이 보필하니 또한 서로 지기()를 만났도다. 법관의 관을 드높이 쓰고서 정색하고 모두 보필했도다. 하급 고을에 선정을 베푸니 백성들이 부모로 불렀도다. 김공이 본래 지닌 지조는 이것만 주장하지 않았도다. 유난히 부끄러워하였던 바는 요직에 진취()하는 것이었도다. 그러나 당당한 그 기개를 없는 것처럼 수렴했도다. 물러나서 만사를 물리치고 사면의 벽에만 의지했도다. 간직된 바가 바로 그러하니 수립한 바가 어찌 다르겠나? 이에 세상과 맞지 않아 나래를 못다 펼쳤도다. 오직 하늘만이 보답하니 자손이 매우 번창했도다. 저 묘역을 바라보니 봉천()이 뒤에 있도다. 내가 그 미덕을 천양()하니 비석이 찬란할 것이도다.

김원립 [金元立] (국역 국조인물고, 1999. 12.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