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원남면 상노리 남연년충신각(遠南面 上老里 南延年忠臣閣)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원남면 상노리 남연년충신각(遠南面 上老里 南延年忠臣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6. 9. 07:02


상노리 경로당입니다

남연년의 충신각은 이 경로당 뒷편에 있습니다.



남연년은 감찰 두명(斗明)의 아들로 음성군 원남면 상로리 천복동(天卜洞)에서 출생하였는데 젊고 어렸을 때부터 강개한 대절이 있어 한서(漢書)를 읽고 무에를 연마하였다. "대장부가 어찌 눈을 씹어먹고 담비털로 잠을 자는 괴로움이 있어도 불가능이 있으랴" 하며 열심히 무술을 연마한 끝에 숙종2년(1676)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숙종 8년(1682)효력부위,선전관이 되였다.

1689년(숙종 15)에는 부친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는 효행이 있었으며, 아우 남극년()과 맹골() 아버지 묘에서 시묘살이를 하자 범이 매일 와서 벗이 되어 주었다고 한다. 도승지 박문수는 “가위 열장부()라 할만하다”하였고, 한성우윤 이세근()은 만사()를 지어 “공의 고상하고 뛰어난 효와 충은 청사백대에 영광스럽게 빛났다”고 하였다.


남연년의 생몰년은  효종4년(1653)~영조3년(1727)이며 자는 수백(壽伯) 이며 호는 현암(玄岩)이다.



그  후 군기시판관 첨정,상원군수 고부군수 중추부도사 도총부도사 훈련원첨정을 거쳐 숙종32년(1706) 황해도 병마우후(정3품)가 되였는데 이때 고을에 곰이 들어와 사람을 해쳐 그 곰을 화살로 잡았다 후에 잡은 그 곰의 가죽으로 상자를 만들었는데 지금도 유품으로 전한다.

숙종35년(1709)도총부경력,선전관,이산군수가 되여정 치를 잘해 그 고을에 흥학비(興學碑)를 세워 칭송을 하였다.



경종원년(1721)절충장군으로 승진하여 성진첨절제사가 되고 이듬해 안동영장 우림위장 영조3년(1727)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으로 청주영장겸 토포사가 되였다. 이때 3월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 항복하라고 협박하자 "내가 나라에 후한은혜를 입었고 나이 70이 넘었는데 어찌 개새끼 같은 너희를 따라서 반역하겠느냐"하면서 끊임없이 그들을 꾸짖다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즉시 3월23일에 자헌대부병조판서에 증직교지를 내렸다.

영조5년(1729)충장공(忠壯公)이라 시호하고 숭선군(崇善君)에 봉군, 영조32년(1756)숭정대부좌찬성에 기증하고 고향인 천복동에 충렬사(忠烈祠)를 세웠으나 훼철되였고 충신문을 세웠으나 쇠락하여 1979년에 다시 세웠다.



주위는 깨끗히 정리되여 있으나 충신각의 단청이 많이 퇴색하였으며 충신각을 보호하는 울타리는 무너지려하고 있었다.

남연년은 현재 청주의 표충사에 향사되고 있다.


아래사진은 청주시 수동에 있는 표충사의 근경입니다.





충신각 현판에는 충신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의정부사지훈련원사오위도총부총관행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겸청주진영장호충장공남연년지문(忠臣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議政府事知訓練院事五衛都摠府總管行折衝將軍龍陽衛副護軍兼淸州鎭營長諡忠壯公南延年之門)라고 적혀있다.



나연년은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청주영장 겸 토포사로 있다가 역도들에게 살해되었다. 난이 평정된 후에 좌찬성으로 증직되고, 청주 표충사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시문집 《남충장공시고》가 있다.


본관은 의령()이며, 자는 수백()이고 시호는 충장()이다.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선전관 등 여러 벼슬을 거쳐 1727년(영조 3) 청주영장 겸 토포사(使)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역도들이 상여에 병기를 넣고 청주성으로 들어왔다. 이를 수상히 여긴 그는 충청도병마절도사 이봉상()에게 상여가 성내로 많이 들어오니 조사해 보아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날 밤 역도들이 감영 안으로 쳐들어오자 이봉상은 대나무숲으로 도망갔으나, 그는 누대 위에 앉아 역도들을 나무랐다. 역도들이 이봉상의 거처를 묻자, 자신이 그라고 말하여 마침내 해를 당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에 좌찬성으로 증직되고, 1729년에는 숭선군()에 추봉되었다. 청주 표충사()에 위패가 봉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