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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량동 율봉공원 찰방허직영세불망비(栗陽洞 栗峰公園 察訪許稷永世不忘碑)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율량동 율봉공원 찰방허직영세불망비(栗陽洞 栗峰公園 察訪許稷永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6. 9. 13:11

 

 

청주시 청원구 율량동에 새로 조성된 율봉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조 고종(高宗) 대에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을 지낸 허직(許稷)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1865년(고종 2)에 건립한 선정비 입니다.율봉공원의 율봉은 조선시대의 역참인 율봉역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입니다.몇번이고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택지개발등 어수선한 관계로 찾을수가 없었는데 택지정리후 온전한 모습으로 얼굴을 보여주네요.양지마을입구에 있었으나 택지개발을 하면서 정비하여 현재에 자리에 다시 세웠습니다.


 

 

허직(許稷)은 조선 후기의 문신입니다.허직의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거주지는 개령(開寧)이었다. 아버지는 허좌(許佐)이고, 할아버지는 허돈(許暾)이며, 증조부는 허박(許璞)이다.

 

허직은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승정원일기 126책 (탈초본 2659책) 철종 13년 12월 3일 경진 8/25 기사 1862년  同治(淸/穆宗) 1년                                  

          

○ 有政。 吏批, 行判書李謙在, 參議洪淳大牌招不進, 參判李興敏進, 承旨進。 以吏批言啓曰, 行判書李謙在, 參議洪淳大竝牌招不進, 小臣獨政未安。 何以爲之? 敢稟。 傳曰, 仍爲之。 以沈宜益爲敦寧都正, 鄭海尙爲同義禁, 李源命爲知經筵, 申弼輔海南縣監, 裵憲璋高山察訪, 許稷栗峰察訪, 軍器判官林鳳章, 加一瓜事, 承傳。이라고 적혀있습니다. 

 

 

1861년(철종 12) 식년 문과의 병과(丙科) 1위로 급제하여 승정원의 가주서(假注書)가 되었으며, 1862년(철종13년) 청주에 있는 율봉역(栗峰驛)의 찰방(察訪)을 지냈다. 1865년(고종 2)에는 예조정랑(禮曹正郞)을, 1866년 사헌부 지평(持平)을 지냈다.1867년 사헌부 감찰(監察)로 재직중에는 명륜당(明倫堂)과 비천당(丕闡堂)에서 열린 식년시(式年試)에 시험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870년에는 사간원 정언(正言)을 지냈고 1872년에 자인현감(慈仁縣監)에 제수되어 외직으로 나갔다.

 

#가주서 라함은 조선시대 승정원의 대리 임시관직을 말합니다.

 

 

 

 

 

 

1884년에는 승지(承旨)로 임명되었으며, 1886년에는 대사간(大司諫)으로서 갑신정변에 가담한 신기선(申箕善)과 경광국 등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1886년에는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으며, 1887년에는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참찬관(參贊官)이 되어 건청궁에서 소대할 때 입시하여 『강목』을 진강하기도 하였다.

 

 

 

 

김해 허씨()는 고려 때 삼중대광()을 지내고 가락군()에 봉해진 허염을 시조로 한 성씨로 가락국의 김수로왕()의 35세손이다. 허씨()의 연원은 멀리 가락국 출신으로 김수로왕의 비()인 허황옥()에 두고 있는데, 10명의 아들 중 맏아들 거등()은 김씨로 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허씨()로 사성()했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에 귀의하여 하동칠불()로 성불()했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30세손인 허선문()의 후손은 공암()[양천], 허사문()의 후손은 태인(), 33세손 허강안()의 후손은 하양(), 35세손 허염()의 후손은 김해()로 분관()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김해허씨 [金海 許氏]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허직이 지낸 율량도찰방은 충청북도 청주에서 조선시대의 교통·통신기관인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관리를 칭한다.

역참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 그리고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를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기관의 하나로 우역(郵驛)이라고도 한다. 역참은 군사·외교 외에 중앙집권을 유지하기위한 행정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역참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역로의 조직과 역원 및 역마의 확보였다. 조선시대 충청도에는 6개의 역참도가 있었으며 율봉도(栗峰道)가 그 중 하나이다.율봉도 찰방(察訪)은 문관 종6품의 외관직으로 마관(馬官), 우관(郵官)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30개월마다 교체하였다. 청주 역원 중 하나였던 율봉역에는 1명의 찰방이 있어 본도의 율봉(栗峰), 저산(猪山), 진천현(鎭川縣)의 장양(長陽), 태랑(太郞), 청안현(淸安縣)의 시화(時化), 문의현(文義縣)의 덕유(德留), 옥천현(沃川縣)의 증약(增若), 가화(嘉和), 토파(土坡), 순양(順陽), 화인(化仁), 영동현(永同縣)의 회동(會同), 황간현(黃澗縣)의 신흥(新興), 보은현(報恩縣)의 원암(原岩), 함림(含林), 회덕현(懷德縣)의 전민(田民) 등 17개 역을 찰방하였다.

『청주읍지(淸州邑誌)』 「율봉조」에는 율봉역의 찰방을 지낸 19명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명익(李明翼), 김득용(金得龍), 민해(閔海), 이향윤(李享胤), 최문호(崔文浩), 김군석(金君錫), 여이량(呂爾亮), 한진하(韓振夏), 원식(元植)[비석을 세웠다], 김중희(金重熙)[비석을 세웠다], 정왕(鄭王)[비석을 세웠다], 이사관(李思觀)[비석을 세웠다], 심달한(沈達漢)[비석을 세웠다], 강장환(姜長煥)[비석을 세웠다), 이기주(李箕周)[비석을 세웠다], 김대곤(金大坤)[비석을 세웠다], 윤철술(尹哲術)[비석을 세웠다], 기문현(奇文鉉)[비석을 세웠다], 강하규(姜夏奎)[비석을 세웠다] 등이다.

 

 

 

 

 

비석의 전면에는 행찰방허공직영세불망비(行察訪許公稷永世不忘碑)라고 음기되여 있으며

뒷면에는 선정비의 건립시기인 동치4년을축5월(同治4年乙丑5月)이라 음기되여 있다 비석의 상태는 아주 양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