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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읍 제내리 이원배송덕비(周德邑 堤內里 李元培頌德碑) 본문
이원배의 송덕비가 있는 곳은 제내리 성동마을이다.
이원배 송덕비 옆에는 4-H운동비가 자리하고 있다.성동마을의 4-H운동비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4-H운동은 지역사회를 개발시키기 위한 실천적 사회교육 운동이었다. Head(두뇌)Heart(마음) Hand(손) Health(건강)의 첫 글자를 딴 4-H 운동은 창의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행동을 통해 청소년을 미래의 주역으로 키우고 농어촌을 발전시키기 위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19세기 말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급격한 공업화로 농촌 경제가 위축되면서 장차 농촌을 지킬 후계 세대마저 끊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확산됐다. 교직자와 농촌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자연과 농업에 대한 청소년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4-H 운동이 시작되었다.
1910년대에는 네잎 클로버 문양에 지(知) 덕(德) 노(勞) 체(體)를 표상으로 하는 4-H 클럽이 조직되었다. 이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중심에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4-H 클럽 출신 인사가 다수 포함된 미군이나 미국 고문단은 주둔국의 농촌 재건과 청소년 교육을 위해 4-H 운동을 보급시켰다.
한국에 4-H 운동이 처음 소개된 것도 미군정 때였다. 1947년 경기도 군정관이던 찰스 앤더슨 중령은 구자옥(具滋玉) 경기도지사와 함께 4-H 운동을 경기도에 도입하기로 하고 각 시군에 농촌청년구락부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4-H 운동은 1952년 정부가 국책사업으로 채택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1953년 발족한 한미재단에 예비역 대령이 된 앤더슨 씨가 고문으로 부임(1954년)하면서 4-H 운동은 날개를 달게 되었다. 1954년 민간 후원단체인 한국 4-H구락부 중앙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그 해 12월 제1회 4-H 중앙경진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정부의 정책적 후원을 바탕으로 4-H 운동은 전후 복구와 농촌 재건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1959년 8월13일 성동 마을에도 4-H구락부가 창립되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4-H운동의 취지에 공감하였다. 첫째 창의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행동양식을 갖추고 친 환경적인 체험으로 농심을 함양한다. 둘째 젊은이를 건전한 미래세대로 키우는 동시에 지역사회와 국가발전에 기여를 목적으로 한다. 성동의 젊은이들은 이와 같은 실천적 청소년 사회교육 운동의 기치 아래 모여들었던 것이다. 당시 4-H지도자는 리동혁 이었으며, 회장은 서상식,부회장은 리봉호가 맡았다.
1959년에 열린 제 5회 4-H 중앙경진대회에서는 성동이 안내판 부문 1등(사진)을 차지하여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로 인해 1959년과 1960년에 앤더슨 대령과 그 일행이 성동 마을을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방문단은 기념품으로 요크셔 돼지와 바크셔 돼지 1마리씩을 기증하였으며,이것을 기르기 위해 이동식 돈사를 만들기도 했다. 이때 충북에서는 4-H운동을 주관하던 한충구 충북 농촌진흥원장, 이영호 중원군 농촌지도소장 등이 동행했다.
4-H운동을 주관하던 앤더슨 씨는 1973년 2월 7일 숨을 거두자 4-H 운동은 새마을운동과 결합되어 농어촌 환경 개선과 생산기반 시설 정비, 자급기반 확충 등으로 사업의 성격이 변해갔다. 이후 4-H운동은 급격한 공업화와 도시화, 농어촌 인구의 감소 등으로 위축되어 지금은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경성 사범학교를 나와 충남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해방 후 음성군과 충주군의 속관을 거쳐 농림부 양정계장을 지냈다. 부친이 돌아가시자 귀향하여
가업을 계승하였으며, 1952년 충북도의회 초대 의원이 되었다. 1956년 2대 도의원에 재선되었으며, 5․16 혁명 후에는 충북 도정 자문위원, 중원군 산림조합장, 충주 엽연초 생산조합장, 충주향교 전교, 충렬사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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