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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은면 수룡리 효녀창원황씨정려각(老隱面 水龍里 孝女昌原黃氏旌閭閣) 본문
노은면 수룡3리에 있는 효녀 창원황씨의 정려각입니다.창원황씨정려각이 있는 천룡마을은 수룡리에 있는 마을이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노은면 수철리와 천룡리의 이름을 따서 수룡리라 하였다.본래 충주군 노은면의 동쪽 지역으로 1914년 충주군 노은면의 수철리(水鐵里), 노현리(老峴里), 산막동(山幕洞), 원우리(院隅里), 천룡리(天龍里), 매여울[梅灘里]과 충주군 가흥면의 팔송리(八松里) 일부를 통합하여 수철과 천룡의 이름을 따서 수룡리라 하였다. 1995년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되면서 충주시 노은면 수룡리가 되었고, 2002년에는 다시 가금면 봉황리의 일부를 흡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철, 원모롱이, 산막, 대상, 천룡, 동막, 팔송 등의 자연 마을을 포함하고 있다.
법정리인 수룡3리는 천룡마을로 불리며 풍산홍씨들의 집성촌이였다.창원황씨의 정려각도 이곳 마을에 세워져있다 1944년 홍수에 유실되여 이곳 풍산홍씨영정을 모시는 영정각에 같이 보관되여 있다. 돈암홍공영정각(遯菴洪公影幀閣)은 마을회관옆에 위치하고 있다.홍가상은 (1649-1740)자는 보이 호는 돈암 또는 시산(時山)이다. 우암 송시열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81년 과거에 급제 1711년 옥과현감 1715년 대구판관을 거쳐 1726년에 세자익위사어(世子翊衛司御)와 시강관(侍講官)을 겸하였다.1729년 가선대부중추부동지사(嘉善大夫中樞府同知使)가 되였다.정성을 다하여 국가에 봉사하고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하였다고 한다.
[충주박물관에 소장되여있는 홍가상의 영정입니다]
정부인에 증직된 창원황씨(1628~1671)는 황성구의 딸로서 1626년(인조4)에 태여났다.그녀는 하늘로 부터 타고난 효행이 있어서 병자호란 당시에 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강원도 양구로 피난을 갔는데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9세였다.그의 아버지가 피난지에서 병이나서 위독함에 어머니는 남편의 병구완에 여가가 없었으며 집안은 환자를 위한 죽 한 그릇도 먹일수 없는 형편이였다,그녀는 혼자서 이 마을 저마을 다니며 구걸을 하고 돌아와 죽을 끓여서 부친을 봉양하였으니 그의 병이 회복되였다고 한다. 하루는 오랑캐가 들이닥쳐서 어머니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함에 그녀의 어머니는 스스로 목을 매였으나 죽지 않음에 두목이 어머니의 배를 칼로 찌르려고 하니 그녀는 오랑캐의 칼을 막고 막고 울며불며 어머니의 앞을 막고 차라리 어머니 대신에 나를 찌르라고 애원하매 오랑캐가 그녀의 효심에 감동이 되여서 물러갔다고 한다.이 후 피난지에서 돌아와 십년을 하루같이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였다.성년이 되여 증 대사헌 홍성휴(洪聖休 1627~1697)에게 시집을 와서 시부모님을 극진하게 모시면서 효도를 다하니 효부의 칭송을 받았다.부(夫)에 따라 정부인에 증직되였다. 뒤에 그가 졸함에 효행을 나라에 올려서 1706년(숙종 32)가을에 정려를 명하였다.창원황씨의 정려는 노은면 수룡리 천룡에 있었는데 1944년 갑신년 대홍수때에 유실되였다고 한다.
풍산홍씨는 홍지경(洪之慶)을 시조로 한다. 홍지경은 1242년(고종 29)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국학직학을 역임한 인물로 풍산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후손들이 풍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풍산홍씨는 고려시대 홍유(洪有) 등 대제학 4명을 배출했고, 조선시대에는 문과 급제자 128명, 무과 급제자 4명, 왕비 1명, 재상 4명, 공신 1명, 청백리 7명을 배출했다.충주에 입향한 풍산홍씨는 수운판관을 지낸 홍박(洪溥), 남원부사를 지낸 홍탁(洪濯), 이천부사를 지낸 홍만운(洪萬運), 홍문관교리를 지낸 홍만수(洪萬遂), 승문원저작을 지낸 홍만통(洪萬通), 의정부사인을 지낸 홍만우(洪萬遇), 전라감사를 지낸 홍주삼(洪柱三), 예산현감을 지낸 홍주문(洪柱文), 사간원헌납을 지낸 홍주진(洪柱震) 등을 배출했다.
문경공 홍이상(洪履祥)의 6형제 중 셋째 아들 홍집, 다섯째 아들 홍박(洪溥), 여섯째 아들 홍탁(洪濯) 삼형제가 1600년대 초 충주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세거하게 되었다. 그 후 홍이상(洪履祥)의 둘째 아들 홍입(洪雴)의 4세손으로 홍문관교리를 지낸 홍중현(洪重鉉)이 1700년 초에 충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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