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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량면 대전리 이시진효자각(東良面 大田里 李時振孝子閣)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동량면 대전리 이시진효자각(東良面 大田里 李時振孝子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9. 27. 10:46


이시진은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효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기부(起夫), 호는 충헌(沖軒).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 이구(李璆)의 후손이다.



이시진(李時振)은 12세 때에 아버지가 병이 들자 대소변까지 맛보면서 극진히 간호했다. 어머니가 병이 나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마시게 하여 소생시켰다. 또한 꿀을 먹고 싶다고 하는데 때마침 엄동설한이라 구하기가 어려웠다. 백번 절을 하여 기도를 하니 꿀이 그릇에 가득차서 어머니에게 드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감탄하며 하늘이 낸 효자라고 칭찬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죽을 먹으며 3년 동안 부모의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시묘를 했다.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마흘마을에 있다. 충주 이시진 묘소는 2010년 12월 10일 충청북도 기념물 제149호로 지정되었다.




현판에는 효자완산이시진지려(孝子完山李時振之閭)라고 적혀있다.

1687년(숙종 13) 송시열이 이시진의 행장을 지었고, 1608년(선조 42) 현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마흘마을에 정려가 건립되었다. 이시진의 정려는 충주 이시진 효자각이라는 명칭으로 2009년 5월 8일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66호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전주이씨 임영대군파는 이한을 시조로 하고 이희열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이다.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임영대군의 후손 이희열(李希說)이 사화를 피하여 충주로 낙향하면서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전주이씨는 신라 때 사공(司空)을 역임한 이한(李翰)을 시조로 한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이한의 22세손이지만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 이안사(李安社) 이전의 계보는 전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전주이씨의 분파는 122파로서 거의 대군(정비의 소생)과 군(후궁의 소생)을 파조로 하고 있다. 전주이씨 임영대군파의 파조 임영대군 이구(李璆)는 세종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충주에 입향한 전주이씨 임영대군파의 대표적 인물은 효자 이시진(李時振)이다.


이시진 효자각에서 바라다 보는 마을의 풍경이다.




李時振의 지극한 효행에 감동한 온 마을 사람들이 연명(連名)으로 글을 만들어 방백에게 전달하고 방백은 다시 임금님께 아뢰어서 1608년 봄(宣祖 41년 萬曆 戊申 春)에 정려를 받아 효자문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그 효행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7권 20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340면에 실려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는 1617년 유근이 편찬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 18권 18책의 목판본으로 되어있다. 이 책은 72명의 충신과 효자, 열녀를 기리기 위해 쓰여 졌다. 편찬 동기는 임진왜란 이후 도의가 문란해지자 국가에서 백성들의 도의를 회복하고자 펴낸 일종의 국민 윤리서이다.